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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14. 2024

시작은 분명 봄이었는데

시작은 봄이었다. 들머리인 토끼재에 매화향이 가득해서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다. 호남정맥 26차 구간은 토끼재-쫓비산-갈미봉-천왕재-매봉-백운산-신선대-한재-따리봉-도솔봉-등주리봉-성불사다. 쫓비산은 3월이면 매화로 뒤덮이는 광양 매화마을의 뒷산이다.   

  

등산을 시작하고 3년 동안 2월 말부터 3월이면 매주 광양, 구례, 하동 등 전라남도에 갔다. 그곳에 가면 봄을 앞당겨 만나는 기분이었다. 매화 한두 개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메마른 가지에 진분홍 진달래가 피어있는 걸 보면 가슴이 뭉클했다. 여리지만 꽃잎을 펴낸 모습을 내 안에 차곡차곡 담다 보면 나에게도 그런 꿋꿋한 기개가 자랄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생겼다.     


쫓비산까지는 여유로웠다. 쫓비산에서 백운산까지만 가면 24km 중 8km만 남는다. 8km 안에  세 개의 봉이 있지만, 그래도 하산길이 아닐까 기대했다. 하지만 백운산을 반도 못 가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배낭 커버만 하고 우의는 입지 않았다. 우의를 입으면 속에서 땀이 차서 젖는 건 마찬가지인데 답답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내리는 비는 그냥 맞는 게 낫다.   

  

하지만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더니 기온이 떨어져서 체온유지를 위해서라도 우의를 입어야 했다. 그래서 입었는데 비가 잦아들어서 벗었고, 또 몇 걸음 가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 진짜,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안 되겠어요, 다시 입어요.”


뒤에 오던 공깃밥 대장님의 말에 나는 배낭을 내리고 우의를 꺼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번개가 쳤다.     


“정상에 가면 바위 쪽으로 가지 마세요.”     


공깃밥 대장님이 바위나 뾰족한 곳은 벼락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올라가지 말고 스틱을 위로 치켜세우지도 말라고 했다. 대장님의 자상한 설명을 듣자 목숨까지 걸고 산에 갈 일인가 싶었다. 찌지직!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며 1,222미터 정상을 향해 가는 내 마음은 착잡함과 걱정이 넘쳐 흘렀다.     


“정상에 바위가 아닌 데도 있어요?”
 목소리가 바람과 비와 천둥소리의 삼중주에 묻히지 않으려면 소리를 질러야 했다.

“아뇨. 바위밖에 없는데 옆으로 가는 길이 있나 찾아봐야죠!”
이 말이 내 귀에는 ‘운이 좋으면 살겠죠’로 들렸다.  

    

번개가 드루와, 드루와, 하며 입을 벌리고 있는 곳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가는 기분. 스틱에 번개를 맞으면 어떻게 될까? 전기구이가 되겠지? 머릿속에 전기화덕에 꼬치를 꿰어 돌아가는 통닭이 연상되었다. ‘이 정도면 하산해야 하지 않나?’ 목숨이 하나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공깃밥 대장님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기상악화로 탈출한다는 회원의 전화일지 모른다고 기대하며 통화 내용에 귀를 쫑긋했다.      


“벌써요? 큰일이네. 우리는 아직 멀었는데, 그래요. 서둘러 갈게요.”

“뭐래요?”

나는 통화를 마친 대장님에게 물었다.
“선두는 등주리봉에서 하산하고 있다네요.”
이 사람들은 무슨 철인인가. 전화를 받고 나서는 외로움이 몰려왔고 마음까지 급해졌다.      


날씨의 방해는 계속되었다. 우박인지 싸라기눈인지 소금인지 정체불명의 알갱이들이 쉼 없이 얼굴과 몸을 강타했다. 태풍급 바람에 힘을 실은 싸라기눈의 위력은 대단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바람이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불어서 우의에 달린 모자로 얼굴 오른쪽을 가리고 몸을 틀어서 바람을 막으며 걸었다. 처음에는 (이미 늦었지만) 선두와 차이를 줄이려고 걸음을 재촉했지만, 나중에는 이러다 사고가 날지 몰라서 겁이 나서 달렸다.     


어느 정도 가다 보니 천둥소리는 멀어졌지만, 바람은 여전했다. 운 좋게 벼락을 맞지 않고 백운산을 거쳐 움푹한 임도에 자리한 한재에 도착했다. 내가 탈출하자고 할까 망설일 때 공깃밥 대장님이 선수를 쳤다.

     

“이제 먹구름 방향이 달라져서 바람은 안 불 것 같아요.”

“그냥 여기서 탈출하면 안 돼요?”
“이곳은 버스도 못 들어오고, 택시를 타도 한참 가야 해요. 날머리 성불사는 백운산 반대편에 있는데, 백운산이 워낙 크잖아요.”   
  


할 수 없이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는 따리봉을 향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으로 따귀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따리봉인가. 줄곧 이 생각만 들었다. 역시나 따리봉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정신 승리로 위안을 삼았다. 산행기를 쓰다 보면 너무 징징거리는 거 아닌가 하는 반성을 자주 하는데, 이번만큼은 이틀이 지났지만 온몸 구석구석에 베인 근육통과 서러움이 손가락들을 저절로 움직이게 해서 조금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고생스럽게 등산을 해야하나.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이 빠져서 밥 생각도 없었지만 걸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해서 두유만 세 개 먹었다. 평소에 좋아하지 않아서 내 돈으로 사지도 않는, 어쩌다 생기면 날짜가 지나서 버리기 일쑤인 두유를 오직 쓰러지지 않으려고 먹었다.      


어찌어찌 날머리에 도착했다. 오늘도 내가 꼴찌였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은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안해서 옷은 뒤풀이하는 식당에서 갈아입겠다고 했는데 회원들이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며 기다려 줄 테니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는 고맙다고 하고 옷 보따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시작은 분명 봄이었는데...토끼재에서 매화향기를 맡았던 일이 아득한 옛날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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