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인월-바래봉-고리봉-정령치로 이어지는 산행을 했다. 고리봉에 도착했을 때 정령치 휴게소로 먼저 내려간 희남 삼촌한테 전화가 왔다.
“4시 10분에 인월 가는 버스가 있어. 빨리 와봐.”
전화가 온 시각은 3시 59분, 고리봉에서 정령치까지 0.8킬로미터를 거의 날 듯이 해서 내려갔다. 지리산 아빠는 금방까지 앞에 가던 내가 사라져서 길을 잃어버렸나 하고 찾았는데 알고 보니 버스를 안 놓치려고 혼자만 냉큼 내려간 것을 알고 어이없어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무이, 아부지”를 스무 번쯤 찾고 제일 굼떴던 내가 순식간에 물 찬 제비로 바뀔 줄은 몰랐다면서.
희남 삼촌이 버스 기사님한테 일행이 오고 있다며 기다려달라고 했더니, 버스에 타고 있던 인월면 주민들이 “바쁜 일도 없는디 천천히 가면 되지 뭘”이라고 했단다. 덕분에 우리 셋은 무사히 버스 탑승에 성공할 수 있었다. 희남 삼촌은 택시를 탔으면 25,000원인데 버스를 타서 3,000원밖에 안 들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나도 버스 뒷자리에 앉아서 1등 주자의 승리감에 취했다.
군내버스에 흔들흔들 몸을 맡기고 차창 밖을 내다보니 드문드문 농가주택과 작은 가게가 보였다. 그걸 보는데 행복감이 밀려왔다. 새벽부터 시작한 산행을 마치고 시골 국도를 달리는 지금이 행복했다. 행복은 어떤 일을 끝낸 직후에 찾아오는 한가로움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버스에서 내리자 거기서 차를 세워둔 구인월 마을회관은 1km가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런 평평한 길이야 일도 아니라며 걸어가기로 했다. 모내기를 막 끝낸 논을 구경하며 흐느적거리며 걷는 우리 세 사람 뒤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웠다.
차에 타고 언제나처럼 맥주와 콜라부터 사러 갔다. 나와 희남 삼촌은 시골가게 숙성맥주, 운전하는 지리산 아빠 몫으로는 콜라를 골랐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 행복하다”라고 했다. 그러자 운전하고 있는 지리산 아빠한테 눈치가 보였다.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하는 사람을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이거 참. 그래서 다음부터는 이렇게 말했다.
“캬! 맛없다.”
“어? 조금만 맛있네?”
“아까보다 맛있다.”
그러자 지리산 아빠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더 짜증 나니까 그냥 마셔!”
그래서 나는 “네”하고 편하게 마셨다. 맥주 한 모금에 오징어 땅콩 두 개씩 먹으며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들었다.
한가롭다는 건 마냥 시간이 많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올라탔을 때처럼 어떤 일을 막 끝내고 난 뒤에 잠깐 찾아오는 감정인 것 같다. 앞서 한 일이 벅찰수록 여유는 크게 다가온다. 등산을 하고 나면 마지막은 늘 한가로움에 취한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 크게. 시간에 쫓기고 고되지만, 끝에는 느긋함에 흠뻑 빠질 수 있어서, 그게 좋아서 등산을 계속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