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내려왔더니 남자 회원들이 계곡에서 씻고 있었다. 여자들이 먼저 갔으면 남자들이 못 오는데 선수를 뺏겼다. 그래도 산아산아님은(여자) 남자 회원들이 “어어, 가면 안 돼”하고 말리는데도 당당하게 갔다. 하지만 나는 “눈 버리니까 안 갈게요”라며 가지 않았고, 광진님은 “서로 눈 버리는 일이야”라고 했다.
나는 희남 삼촌이 생수병 큰 거를 줘서 화장실 벽 뒤로 갔다. 회원들은 생수 한 병으로 말끔해져서 오고는 했는데, 나는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씻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를 감다 보니 물을 거의 다 써서 목과 팔에 물을 뿌리다 끝났다. 옆에 있던 메아리3님이 자기는 얼굴만 씻으면 된다며 반 병 넘게 남은 생수를 줘서 나는 받아서 옷 안으로 배와 엉덩이에 물을 부었다. 그렇게 해도 씻은 게 아니라 물을 묻히다 만 수준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도가 없는 간이 화장실인 데다 좁고 지저분했다. 옷을 둘 때도 없어서 쓰레기가 차 있는 큰 종량제 봉투 위에 옷을 놓고 겨우 갈아입었다.
차가 있는 곳으로 왔더니 희남 삼촌이 물었다.
“다 씻었어?”
“물을 어떻게 써야 돼요?”
“우선 얼굴부터 씻어. 그리고 목 하고 어깨로 물을 부으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거여.”
삼촌은 그렇게 말했다.
한겨울이 아닌 다음에는 10시간씩 등산을 하고 나면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싹 젖고, 배낭까지 땀으로 절여진다. 그 상태로 버스 좌석에 앉으면 기사님한테 민폐라 씻는 게 맞다. 하지만 씻을 만한 곳이 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산행지마다 여건이 달라서 ‘호텔급 샤워’부터 화장실에서 하는 ‘한 컵의 물로 하는 샤워’까지 그 방법도 다양하다.
호텔급 샤워는 뒤풀이하는 식당에서 하는 샤워다. 산객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거나 살림집을 겸하는 식당은 주인이 샤워실을 내줄 때가 있다. 화려한 시설은 바라지도 않고 물만 잘 나오고 손님이 붐비지 않으면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다.
‘김해산장’은 낙남정맥 1구간을 하고 뒤풀이했던 식당인데, 마당에 수도가 있었다. 이날 남자는 19명, 여자는 3명이었는데 남자들은 마당에서 웃통을 까고 씻었고 여자들은 샤워기가 있는 화장실에서 씻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대로 씻기 때문에 혼잡할 걱정은 없었다.
먼저 온 회원들이 화장실에서 씻으라고 알려줘서 들어갔더니 여자는 나밖에 없어서 독차지할 수 있었다. 9시간 동안 땀으로 젖은 옷을 벗는데 한 치에 주저함도 없었다. 호수에 머리부터 갖다 대자 차가운 물줄기에 기분 좋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 순간만큼 생리적 욕구에 충실한 순간이 있을까. 비누칠도 필요 없이 몸에 물만 흘려줬는데도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목에 수건을 걸고 반바지, 반발 티에 슬리퍼를 끌고 나가는데 몸이 날아갈 것 같다. 화장실을 열고 나가자, 남자들이 마당에서 씻고 있었다. ‘어이쿠’ 하고 서로 놀랐지만, 보는 사람이 손해기 때문에 우리는 빛에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에 앉았더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젖은 머리를 털면서 맥주가 잔에 채워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여기는 천국이 분명하다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나 보다.
“산에서 내려와서 씻고 먹을 때만큼 확실하게 행복한 순간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옆에 앉은 광진님이 동의해 줬다.
먹고 마시고 나면 이제 남은 건 배부른 돼지가 되어 흔들흔들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자는 일밖에 없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달라붙는 생각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일 없이 좌석 등받이에 등을 대는 순간 잡혀가듯 잠에 빠져든다. 너무나 깊은 잠의 동굴에 갇혀 휴게소에 도착해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씻고 먹고 마시고 자는 이 단순한 일에 집중하고 나면 산다는 일이 그렇게 복잡하지만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