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버스가 출발할 때부터 비가 왔다. 일기예보에 오늘 산행지인 충북 괴산군에 오후 4시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제법 빗줄기가 굵었다. 월요일부터 전국적으로 호우경보가 발령된다는 뉴스가 나오는 게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대야산 직벽 밧줄 구간이 안 그래도 위험한데 이 비를 맞고 어떻게 갈지 가는 동안 생각 좀 해볼게요.”
버스에서 전재산회장님이 말했다.
한 달 전부터 회원들이 대야산 직벽구간은 백두대간 34개 구간 중 가장 힘든 코스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산행공지에 거리는 20.5km인데 소요 시간이 10시간이라고 되어있는 걸 보고 대체 얼마나 힘들어서 그러나 나는 죽었구나하고 있었다. 산행 거리가 20km 정도면 보통은 8시간 또는 9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신청할게요(왜 10시간인지 궁금해하며)”
카페 산행 신청란에 내가 이렇게 썼더니, 산에서도 달리고 닉네임도 달려님이 친절하게 이런 댓글을 달아주었다.
“힘든 게 열 시간이죠. 암릉에다 시속 2km면 보통 힘든 게 아니겠는데요. 땡볕에 성인음료까지 먹으면 골로 가기 십상.”
오늘은 산님이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실 것인가 기대가 아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전재산 회장님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아무래도 대야산 밧줄 구간은 패스합니다. 대야산 정상까지 탐방로로 갔다가 이동할게요.”
회원들은 그러는 게 좋겠다며 박수를 쳤고, 나도 “그럼요, 그럼요, 안전이 우선이죠”하고 기쁜 마음으로 찬성했다.
하지만 비는 오고 또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쉼 없이. 내리는 비야 어쩔 수 없고 나는 바위가 많은 길을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일행과 거리가 벌어지지 않게 빨리 발을 놀렸다. 나도 모르게 ‘조심조심’을 중얼거렸다. ‘조심하면서 빨리 가기’에만 신경 쓰다 보니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툭착착, 툭착착, 스틱을 찍고 오른발, 왼발, 마치 기계가 된 것처럼 걸었다.
긴 오르막이 나타나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열. 또 하나, 둘, 셋, 넷... 스물. 열 개가 열 개면 백 개, 백 개가 두 개면 이백.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숫자를 세지 않고 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숫자세기는 힘들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가 뇌출혈을 겪고 쓴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에서 우리가 힘들다고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좌뇌에서 ‘힘들다’고 판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초의 감정은 90초면 사라지기 때문에 90초 이상 지속되는 고통은 나의 좌뇌, 바로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기하게도 철학을 소개하는 책<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스토아학파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내가 “동의”했기 때문이고 고난은 우리의 선택이라고 했다. 따라서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면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했다.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하나의 방법으로 외로울 때 “평온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소개하기도 했다.
스토아학파가 기원전 3세기에 했던 주장을 뇌과학자가 2019년에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했던 숫자세기가 바로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이름 붙이기였다. 가긴 가야겠는데 하도 괴로우니까 뭐라도 해야 해서 고난의 한 발 한 발에 번호를 붙인 거였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기 때문에 ‘생각 없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그 어떤 철학과 과학지식 없이 몸으로 깨우친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열 걸음 왔네. 그럼 다시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기껏 올랐는데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기를 거듭했고 어느덧 산행 시작한 지 7시간이 경과했다. 메아리 부부(닉네임은 메아리 2, 메아리 3)와 산아산아님, 신입회원 두 명, 내가 함께였다.
“쫌 쉬었다 가요!”
뒤에서 메아리 3님이 소리쳤다.
우리는 마지막 봉우리인 청화산이 가도 가도 안 나와서 쉬어가기로 했다. 나는 가방에서 아껴둔 황도 통조림을 꺼냈다. 디팩에 얼음물과 함께 넣어놔서 아직도 차가웠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깠더니 영롱한 국물이 드러났다. 국물부터 한 모금 마시자 단번에 갈증이 가시면서 당이 ‘힘을 내!’ 하면서 몸의 세포 하나하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는 것 같았다. 이때 산아산아님이 “국물 좀 마실게요”하고 통조림을 가져갔고 다시 내 손에 돌아왔을 때는 국물의 반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황도들을 자박하게 있었기에 실망하지 않고 떠먹으려는데 메아리 부부가 왔다.
“이것 좀 드세요”
내 입으로 가려던 젓가락에 낀 황도를 메아리 2와 메아리 3에게 주고, 국물도 마시라고 했다.
돌아온 깡통에는 이제 국물은 거의 없고 황도만 몇 개 남아있었다. 그때 처음 온 회원 두 분의 지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깡통을 통째 넘겼다.
“다 드세요”
내 얼굴도 아마 똑같겠지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분들 앞에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에 국물을 조금 먹은 것 말고 황도는 하나도 먹지 못했지만 메아리 부부가 바나나 큰 것을 주어서 처음 온 회원 두 분과 나눠 먹었고, 양갱이 두 개 있어서 산아산아님에게 하나 주고 나도 먹었다.
드디어 청화산을 올라갔고 ‘늘재 2.6km’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걸 보자 내 가슴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원래 코스는 늘재에서 3km 더 가서 있는 밤티재까지지만, 전재산 회장님이 비도 오고 늘재에 버스를 댈 테니 선택하라고 했다. 밤티재까지는 봉우리도 하나 더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기를 ‘선택’했다. ‘늘재 2.6km’를 ‘행복 2.6km’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행복으로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가뜩이나 가파른 내리막이 비 때문에 땅이 질퍽거렸고 미끄러웠다. 몇 번 넘어지고 나서 후들거리는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주며 내려갔다. 늘재라고 생각한 곳에 도착했지만 있어야 할 버스가 없었다. 주차할 만한 곳을 찾아 도로를 따라 위아래로 1km씩 가봤지만 차는 보이지 않았다. 전재산 회장님에게 전화하니 신입회원(고든)과 함께 가고 있으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비를 피할 때가 없어서 그냥 맞고 서 있으니까 30분쯤 뒤에 회장님이 나타났고, 고든님이 즐겁게 해주지 않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회장님에게 내가 “고생하셨죠?”라고 하자, 회장님은 “다 때려치울 거야!”라고 했다. 어? 좀처럼 화를 내는 일이 없는 회장님의 뜻밖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중에 들어보니 장거리 등산이 처음인 고든님이 다리에 쥐가 나서 회장님이 약을 주고 가다 쉬다 겨우겨우 온 모양이었다. 쥐가 나지 않고 내 한 몸 챙겨서 오는데도 무리였으니 그 비를 다 맞아가며 두 분 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회장님한테는 자주 있는 일일텐데 오늘따라 좀 예민하다 싶었는데, 나중에 회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회장님이 패스하자고 한 대야산 직벽 밧줄 구간은 함께 등산을 하던 아내가 사고가 났던 곳이었다. 아내가 밧줄을 잡으려고 하다가 놓쳤는데 천만다행으로 진달래 잡목에 걸려서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 출발할 때부터 회장님은 아찔했던 사고의 기억이 떠오른 데다 비까지 내려서 마음이 복잡했을 거다.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을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낀 날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산이 좋아졌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을 때 나는 리딩해주는 분들 덕분에 7년 동안 산을 갈 수 있었다. 그런 내 입장에서 전재산 회장님 그리고 군산에 내가 처음 가입한 산악회의 장팀장님에게 늘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어디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평안함과 위안을 산에서 느낄 때 불쑥 그분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분들도 같은 걸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나뿐 아니라 전재산 회장님한테 도움을 받은 산우들의 질긴 마음들이 아내를 지켜줬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분명 있고 그 기운이 회장님의 소중한 사람을 보호해 줬다고.
그리고 회장님은 아무것도 때려치우지 않았고 얼마 후 고든님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상하게 비 온 날 등산한 일을 글로 많이 쓰게 되는 것 같다. 실제로 비가 온 날 산행을 많이 했기도 했지만, 비 때문에 기억에 더 생생히 남아서인 것 같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