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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19. 2024

‘그만 가자’와 ‘그래도 가자’

“비도 오는데 왜 그랴.”

“놔둬. 저것도 다 팔자여.”          


버스 안에서 회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알도령과 석파님이 지난달에 못한 구간(25km)을 어제부터 걸어서 오늘 시작 지점에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11월에다 밤새 내리는 비까지 맞으면서 말이다. 한편 나는 집을 나설 때부터 빗줄기가 굵어져서 심란한 참이었다. 이 비를 맞으면서 24km를 어떻게 가나 하는 걱정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마라토너 산악회 회원 중에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가는 이가 몇 있는데 알도령은 그중 대표주자다. 한증막 같은 날씨에 하산했다가 산우들에게 주려고 맥주와 막걸리를 가지고 다시 올라온 두 분 중에 한 분이 바로 알도령이다. (다른 분은 석파님) 탈수증세가 왔다는 (엄살이 의심되는) 전화를 받고 주저 없이 맥주 피쳐 6개를 메고 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 알도령님이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나의 의심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다.           


알도령은 95.2km 지리태극 같은 각종 종주를 무박으로 하는 분으로 최대 48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고 걸어봤다고 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심을 풀기 위해 알도령님한테 종주할 때 가장 힘든 게 뭔지 물어봤다.          

“제일 문제가 잠이거든요. 제가 평소에는 커피를 7, 8잔을 마시는데, 무박 종주를 하기 일주일 전에는 하루 한 잔으로 줄이다가 당일에 커피를 연달아서 마셔요. 그러면 절대 잠이 안 와요.”


알도령님의 말은 몸을 카페인에 민감한 상태로 만들었다가 산행 직전에 각성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잠까지 못 자면서까지 무리하게 등산을 하는 이유가 뭘까? 완주에 대한 성취감 때문에? 스스로의 한계를 이겨냈다는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          


“태극종주를 하는데 ‘J3클럽’도 왔더라고요. 헬퍼들이 라면, 바나나, 물을 나눠 주길래 나는 회원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래도 괜찮다면서 컵라면을 줘서 잘 먹었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까 살 것 같더라고요.”      

    

“마창진 종주(마산 봉화산~진해 대발령, 80km)하는데 한 커플이 맞은편에서 오다가 ‘이거 드세요’ 하면서 얼음물을 주더라고요. 언뜻 보기에도 내가 힘들어 보였나 봐. 보면 일반 산행을 하는 사람인지 종주하는 사람인지 알거든. 참 고맙더라고요.”           


의외로 알도령님의 이야기 속에는 성취감이나 자신감에 관한 것은 별로 없었다. 종주를 준비하면서 했던 훈련과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진짜 못하겠다 싶을 때는 없었어요?”     

“한계는 무조건 오죠. 그런데 한고비를 넘기면 세 배를 더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죽어도 가자, 하면 또 어떻게든 가게 돼 있어요.”      

“한고비를 넘기면 세 배를 더 간다고요?”     

“연하씨도 이십 킬로대 산행이 힘들면 삼사십 킬로미터짜리 종주를 한 번 하세요. 그러면 ‘내가 그것도 했는데 이걸 못 해?’하는 자신감이 생겨요.”


이십 킬로미터도 힘든데 삼사십 짜리를 하라고요....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되는 그 말을 곱씹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도령님은 내 안에 생긴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 변화의 순간을 만나고 싶어서 또다시 긴 종주에 도전하는 게 아닐까. 작년에 갔던 곳이라도 계절, 습도, 바람, 온도, 모든 게 그날과 같지 않기 때문에 새롭다. 무엇보다 내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곳은 내가 한 번도 밟지 않은 땅인지 모른다.          

내가 가지 않은 땅, 내가 경험하지 못한 변화가 있다는 건 기대를 갖게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그 끝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내 두 다리로 길을 나서기만 하면 찾아갈 수 있는 그곳은 나이가 들면 드는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그만의 새로움이 있기에 탐험은 끝나지 않는다.          


나도 가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 안에서 아우성치는 ‘그만 가자’와 ‘그래도 가자’에 발을 맞춰 나아가다 보면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 산이 아니라 내 안의 깊은 곳, 속으로 속으로 파 내려가는 것 같다. 시간과 공간 감각이 사라지고 내 속에 잠기는 기분이다. 그렇게 잠겨 있다 깨어나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넓은 세상만큼이나 내 안도 깊고 다채롭다는 걸 확인하면 배짱이 생긴다. 한발 한발 걷듯이, 일요일마다 등산을 가듯이 뭐든 계속하면 되겠지 하는 배짱.     


한 봉우리 넘었다고 끝나지 않는 종주등산처럼 글쓰기와 밥벌이로 하는 과외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해결은 못해도 ‘그래도 가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가다 보면 이전에 밟지 않은 땅을 만나지 않을까.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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