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봉우리를 남겨두고 석산고님이 먹을 걸 다 털고 가자고 했다. 석산고, 허허, 고든, 푸른산, 이정동, 나까지 여섯 명이 자리를 잡고 배낭을 내렸다. 9시간에 걸쳐 21km를 걸어온 뒤라 모두 지쳐있었다.
“얼마나 남았어요?”
내가 물어보자 석산고님이 2.8km라고 했다.
“2.8km 정도야 둥굴러도 가지 뭐.”
푸른산님 말에 원성이 불같이 일어났다.
“둥굴러서 가요?”
내가 일단 말을 받았고,
“너나 둥굴러서 가지, 우리는 못 가.”
허허님까지 합세했다. 석산고님과 고든님도 지쳤을 때는 2.8km도 멀다며 한 마디씩 보탰다. 금방까지 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협공을 펼치자 푸른산님은 어이없어했다.
포도와 황도를 살려고 먹고 그래도 가야지하며 일어섰다. 얼마쯤 가다 보니 우리가 가는 길 아래로 임도가 보였다. 임도는 늘씬함을 자랑하며 나에게 유혹의 손짓을 했다.
“임도로 가면 안 돼요?”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석산고님이 휴대폰으로 지도를 찾아봤다.
“임도로 가도 돼. 대신 거리가 조금 늘어나긴 하는데 산 하나 넘는 것보다는 시간이 단축될 거야. 어떻게 할 거야?”
임도는 편안해 보였고, 거부하기에 나는 지쳐있었다. 마침 내 옆에는 허허님이 있었다. 희남 삼촌이 허허님과 나를 ‘뺀질이 남매’라는 별명을 지어줄 만큼 이런 일에 우리는 의견이 일치했다. 누가 탈출하자고 하면 나도 모르게 허허님을 보게 된다. 그러면 허허님은 “왜 날 봐요”라고 하지만.
“푸른산은 둥굴러서도 간다니까 그냥 가라고 하고 우리는 임도로 가자구.”
허허님이 말했고, 허허님, 나, 석산고님은 임도로 내려섰다. 평평한 땅을 밟으니 살 것 같았다. 때마침 바람도 뒤에서 불어서 내 등을 살살 밀어주었다.
“고든 내려와!”
뒤에 고든, 이정동, 푸른산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허허님이 고든님만 불렀다. 크크크, 우리만 편하게 간다고 생각하니까 실실 웃음이 났다. 산길파(푸른산, 그냥 가는 것도 모자라서 맨발로 걷는 이정동), 임도파(나, 허허, 석산고, 고든) 두 편으로 갈라졌다.
그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생각났다. 영화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 전체 건물이 무너져서 폐허로 변했는데 황궁아파트만 살아남았다.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외부인들을 몰아냈는데, 나는 우리가 황궁아파트 주민이 된 것 같아서 그걸 따라 해 봤다.
“임도는 우리의 것! 우리는 임도주의!”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떠들 때만 해도 행복했다. 내분이 일어나고, 외부인들이 밀고 들어오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 모른 채 자기들만 선택받은 양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황궁아파트 주민들처럼.
임도를 벗어나 도로로 들어섰다. 한참을 갔는데도 도로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든 그때, 앞에 가는 석산고님과 허허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쫓아가서 들어보니 6km 더 가야 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헉, 6km는 조금이 아니잖아요. 초반에는 임도가 우리가 가야 하는 산길과 같이 나 있었는데 강 때문에 우회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내가 한 선택에 무슨 말을 하랴. 그때부터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도로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얼굴이 따가워서 손수건으로 가리고 싶었지만, 배낭에서 손수건을 꺼낼 짬도 낼 수 없었다. 길도 모르는데 석산고님과 허허님을 놓치면 안 되고, 우리가 꼴찌라서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한테 민폐가 돼서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때 밭에 있는 호박잎이 눈에 들어왔다. 호박잎 두 개를 따서 얼굴을 가려봤더니 한결 낫길래 호박잎을 햇볕을 차단하는 버프로 사용했다.
그렇게 가고 있는데 도로가에 차들이 길게 주차되어 있고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과 튜브를 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다. 물놀이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산이 에워싸고 있고 수위가 낮은 강이(창원 마산합포구 진전면 금암천) 길게 흐르고 있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때는 일요일 오후, 하늘에 유유히 구름이 흘러가고 마지막 더위를 즐기는 사람들로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앞서 걷던 석산고님과 허허님이 도로에서 강으로 내려섰다. 물론 헤엄이라도 쳐볼까 해서는 아니고 강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서였다. 나도 강가를 따라 걷다가 한 가족을 발견했다.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 덮인 실개천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물을 튕기고,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에 잎사귀가 반짝거리는 신기루 같은 장면이었다. 그 옆으로 수배범처럼 달리고 있는 우리 네 명은 참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호박잎 버프가 축 늘어져서 오그라들 때쯤 버스가 보였다. 버스는 그늘에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뭐 하다가 이제 와, 하는 것처럼. 회원들은 싹 씻고 출근해도 될 만큼 말끔한 모습으로 (빙글거리며) 우리를 반겨줬다. 특히 전재산 회장님이 놀리고 싶어서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잔머리 쓰다가 고생했네.”
오랜만에 보는 회장님의 밝은 미소였다. 최근에 회장님이 하나도 힘들다는 금연과 금주를 동시에 시작해서 회원들이 막걸리를 먹는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내가 “회장님은 삶의 기쁨이었던 술과 담배를 잃었어요. 세상을 다 잃은 심정일 거라고요” 하면서 회장님을 배려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놀렸다. 그랬는데 지금 회장님의 신난 얼굴을 보니 왜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기쁨으로 삼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때마침 푸른산님이 목에 수건을 걸고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고생했어요”라고 하는데 눈은 웃고 있었다.
그날 나는 원래 코스보다 5km 오버한 28km를 걸은 후 노선을 변경했다. 임도를 좋아하는 ‘임도주의’에서 임도를 조심하자는 ‘임도주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