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구의 노트를 찢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원장일 때 하지 못한 말 04

by 김준정

예진이는 화학공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에서 안정적인 점수가 나오지 않아 걱정이었다. 친구들처럼 미리 중학교 때 고등수학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예진이는 시험 때마다 수학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교과서, 문제집 3권, 학교와 학원에서 내준 프린트까지. 틀린 문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풀었다. 1학년 내신 성적이 나오는 날, 나는 예진이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저 1등급이에요.”

“고생했다. 이대로라면 2학년 때도 잘해나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2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예진이는 3등급을 받고 말았다. 기말고사도 마찬가지.

“선생님, 이상해요. 제 등수는 그대로인데, 3등급이 되었어요.”


예진이가 다니는 학교 1학년 인원은 300명이었다. 이 중에서 1등급 비율인 4%는 12명이고, 예진이는 12등으로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2학년 이과 인원은 100명, 그러니까 이제는 4등 안에 들어야 1등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거다.


문제는 예진보다 성적이 좋았던 11명이 모두 이과를 간 것. 1등부터 4등까지 1등급, 5등부터 11등까지는 2등급, 12등부터 23등까지는 3 등급 되는 것이다. 1학년 때와 똑같이 12 등인 예진이가 3등급을 받게 된 이유다.


“어쩔 수 없지. 더 열심히 해보자.”

(이런 말 할 때 가 제일 싫었다)


이과는 미적분 1과 확률과 통계(2009 교과과정)를 1 학기에, 미적분 2와 기하벡터를 2학기에 시험을 봤다. 1학년 때에 비해 2배의 양을 배우고, 매번 수학시험을 두 번씩 치르게 된다. 선행을 하지 않은 예진이가 두 과목의 진도를 나가고, 시험 준비까지 하기에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 부족했다. 성실하게 시험 준비를 해도 등수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해내는 예진이가 장하게 느껴졌다. 녀석이 안쓰러운 나는 시험을 치고 난 후에 이렇게 묻기에 이르렀다.


“다른 애들 성적은 어때?”


앞에 있는 11명과의 싸움 같았다. 예진이 실력이 올라가도 그 친구들보다 앞서 나가지 못하다면 성적은 그대로다. 오히려 친구들 중에 누군가가 시험을 못 보거나 전학이라도 가면 예진이의 등급은 올라가게 된다.


“걔들은 선행을 다했더라고요. 미리 시작하지 않은 제 잘못이죠.”


함정 같은 걸 만들어놓고, 거기에 아이들을 몰아넣는다. 그리고 다그친다. 열심히 하라고, 그러면 성공할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1등급이 되는 인원은 정해져 있고, 9등급은 나오게 되어있다. 구조의 부조리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정책 실무자들은 평가하기 편하니까 등급제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학부모들은 내 아이만 1등급이 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녀들은 몰아세운다. 나 같은 사교육 종사자들은 부모들의 불안과 경쟁심리가 가중되는 것을 이용한다.


“친구의 노트를 찢게 만드는 이런 현실을 만들어준 어른들, 고맙습니다.”


한 고등학생이 쓴 글이다. 글쓴이는 친구가 노트를 빌려달라고 할 때 머뭇거리고, 친구에게 가르쳐주는 시간을 아깝게 만드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아이들이 아픈 친구를 외면하고,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런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만든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경쟁이 익숙해져서 계속 위로만 올라가려고 하고, 어렵게 사는 이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니 노력하지 않았으니 고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미래형 인재는 협동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협업을 통해서 조직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기업의 관리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맞게 가고 있는 건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 끼만큼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