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좀 데리고 와 봐.”
임춘빈 선배님이 말했다.
“산에 갈만한 친구가 없어요. 저를 별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요?”
3원 23일 팔영산 산행에 참여한 인원은 31명, 그중 여자는 6명이었다. 산악회에 여자회원수가 확실히 적긴 하다. 또한 40대는 6명이고, 30대 이하는 없었다. 그러니 40대 여성인 나로서는 산악계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 번은 A와 지리산을 간 적이 있다. A는 독서모임에서 친해졌는데, 자기도 산에 데리고 가 달라는 말을 내게 자주 했다. 추석 연휴를 맞아 지리산 직전마을로 올라가서 피아골 대피소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성삼재로 하산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피소에서 우리는 새우를 굽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눈이 시리도록 밝은 달빛 아래에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음료와 함께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때의 온도, 공기의 습도, 풀벌레 소리,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촉감으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아침메뉴는 어묵탕과 볶음밥. 그녀는 나의 준비성과 장비에 감탄을 했고, 그렇게 먹는 밥이 꿀맛이라고 했다. 싱그러운 가을 아침, 지리산 중턱에서 먹는 아침밥은 오성급 호텔 조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맛이었다.
그렇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그녀를 꼬시려고 했다. 등산의 매력으로 홀려서 함께 다니려고 했지만 이후에 몇 번 더 산행을 간 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하루 온종일 시간을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어쩌다 한 번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산에 가는 것을 아이와 남편에게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면서 지리산 종주를 갔다. 꼭 마흔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 없는 어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려면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메어 보는 50리터 배낭 때문에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눈 덮인 지리산에 첫 발을 내디뎠다.
3일간 머무른 지리산은 내 예상과 달랐다.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 ‘이건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면서 연하천과 장터목에서 하룻밤씩 보냈다. 셋째 날, 천왕봉으로 올라가는데 눈물이 솟구쳤다. 힘들어서도 아니고 정상에 오른다는 감격 때문도 아니었다. 지난 시간 남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버둥거리느라 속이 문드러지는 것도 모른 채 살아온 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도 더 얼마나 몰아세우려고 여기까지 온 거냐는 질책이 내 마음에서 일었다. 내가 흘리는 건 오랜 시간 곪아있던 것에서 터진 고름 인지도 몰랐다.
무엇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지리산에 있으면서 내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부족하더라도 또 그런대로 살아가면 그뿐이었다. 지리산의 너른 품속에서 울은 덕분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고, 필요 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사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게 되었다.
나를 떠받쳐주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이 어두운 내가 길을 잃을 때마다 찾아갈 지리산이 있고, 태양이 항상 비춰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던 이전과는 달랐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나는 요즘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뭐라도 두들기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글 쓰는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다. 내가 지금 좋은 글을 쓰기를 바라는 것은 운동을 이제 시작한 사람이 근육질의 몸매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저 ‘멈추지 않겠다’는 바람만 있을 뿐이다.
글 쓰는 일도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몸짱이 되듯 작가가 되는 날도 분명히 오리라 믿는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도 괜찮다. 조금 일찍 작가 타이틀을 단다고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평생을 두고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아무도 봐주는 이 없어도 무심하게 피어있는 진달래를 보며 나직이 타일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