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이 식당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신규 상담을 할 때 학부모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노력을 안 해요. 성적을 올리려고 본인이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안 보여요.”
상담이라기보다는 하소연에 가깝다. 부모님은 자식이 이 말을 듣고 깨닫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지만, 옆에 있는 아이의 표정은 시큰둥하다. 이미 귀에 딱지가 삼층집을 지을 정도로 많이 들었을 테니까.
한식에서 중식으로, 아니면 고깃집으로 옮긴다고 해서 없는 식욕이 생길까? 우선 답답하니까 식당이라도 바꿔보자 싶겠지만 같은 문제가 다시 반복될 뿐이었다. 오히려 더욱 타이트하고 강압적인 학원을 보낸다면 학습 거부감이 더욱 커질 수가 있다. 억지로 밥을 먹이려다 거식증에 걸리는 것처럼.
교재를 바꿔보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메뉴 개발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음식을 아무리 다양하고 맛깔나게 준비해도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을 먹게 할 수는 없다. 식욕 아니, 의욕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힘내. 파이팅!”
이 말처럼 힘 빠지는 말이 없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실망하는 자식에게 “다음에 열심히 하면 된다.”고하지만 이런 실패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다. 예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전교 18등이었지만 한 학기 만에 400등으로 떨어졌다. 일 년에 네 번 소풍을 가고 각종 수련회, 축제로 자유로운 학풍의 중학교와 성적을 중시하는 고등학교는 분위기가 딴판이라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성적 우수자들로 구성된 특반으로 배정되면서 숨 막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반 친구들을 보면서 “쟤는 몇 등일까?”생각하고 누구는 영어를 잘하고 누구는 과학천재고 이런 식으로 평가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감이 떨어지고 반짝거리는 친구들 속에 나만 돌멩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반에서도 잘하는 축에 속했으니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었지만 좀처럼 그런 생각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친구들과 비교하고 나를 하찮게 생각하던 것이 친구들 부모님의 직업이나 부유한 환경으로 옮겨갔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경도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다.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을 가진 내가 중학교 때까지 어렵지 않게 얻은 성적으로 나를 지탱해 왔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한 두 명이 아닌 반 친구들 모두가 경쟁자로 다가오면서 공부하는 것이 마치 괴물과 대항해 싸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치지 않도록 도망이라도 가듯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었다. 제대로 된 경쟁자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내가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한꺼번에 만났으니 두렵기도 했다. 아이들은 준비물도 놓치는 때가 없고, 숙제도 잊는 법이 없었다. 음악 선생님은 피아노는 체르니 몇 번까지 쳤다고 말하는 아이들 중에 반주자를 정하면서 “후보가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프다”라고 했고, 미술시간에는 연필을 눕혀서 데생을 하는 아이들이 나는 신기했다. 그래도 체육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드리블 연습을 쉬는 시간마다 한 덕분에 실기 시험에 만점을 받는 아이들을 보고 기가 질려버렸다.
물론 50명 반 아이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반수 이상의 아이들의 의욕적인 모습에서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이것은 반 친구들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없었다. 아니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법을 몰랐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외부의 평가로 나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여겼다. 그런 나에게 막강한 수십 명의 아이들은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잔뜩 움츠린 시간이었지만 알고 싶었다. 내선택이 아닌 것으로 상황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거냐고. 전에 나는 이렇지 않았다고. 악바리라고 불릴 정도로 집요하게 노력했다고. 그런데 지금은 힘이 어딘가로 다 새어버린 것 같다고. 아무리 쥐어짜 내려고 해도 도무지 힘이 생기지가 않는다고. 왜 그런 거냐고 묻고 싶었다.
부모님은 밤늦게 들어와서 새벽에 나가시는 일을 했고, 선생님은 반 평균 깎아 먹는다며 나를 복도에 하루 종일 꿇어앉게 했다.
긍정적인 마음이란 ‘무조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내 주변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자연조차도 고르지 않다는 걸 수용하는 마음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와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 속에서도 매일 해가 뜨고, 꽃이 피고, 벌이 날아다니는 자연처럼 끊임없이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긍정적인 힘이다.
매일 하는 네 가지 근력운동과 감사노트 쓰는 일이 긍정의 힘을 키워준다.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일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서 실패 앞에서 무너지지 않게 해 준다는 걸. 다시 일어서게 한다는 걸.
의욕은 갑자기 생기기보다 매일 꾸준히 쌓아가는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