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은 조연이었던 적이 없었다
영화 <럭키> 후기
두 남자의 운명이 뒤바뀐 장소는 목욕탕이었다. 명품시계와 지갑을 가진 남자를 또 다른 남자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바로 직전에 생활고로 자살을 시도했던 무명배우 재성은 마지막으로 신변을 정리하기 위해서 목욕탕을 왔다. 비명소리가 들리고 무심하게 때를 밀고 있는 재성의 발 밑으로 열쇠 하나가 미끄러져왔다. 아까 본 명품시계 주인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있다. 열쇠는 명품시계 주인의 것. 어수선한 틈을 타 자신의 열쇠를 누워있는 남자 옆에 슬쩍 놓아둔다.
재성은 바뀐 열쇠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다. 최고급 양복에 구두를 신고, 외제차를 운전한다. 한 걸음씩 타인의 삶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처음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점차 대담해지기 시작하고 어느새 낯선 남자의 집까지 들어가게 된다.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니. 옷방이 자신의 옥탑방 보다 큰 그곳에서 재성은 결심한다. 자신의 행운을 마음껏 누리기로.
영화 <럭키>는 이렇게 시작한다. 기발한 설정에 감탄했고, 대리만족으로 옥탑방 총각이 제대로 즐겼으면 하고 기대했다. 재성이 중국집 요리를 종류별로 시켜 먹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고, 와인 냉장고를 열면 ‘그래, 로마네 꽁띠 정도는 마셔줘야지’하는.
“자기 것도 아니면서 너무 하는 것 아니야?”
함께 보던 도덕군자 딸이 말했다.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인데?”
달리 변호해줄 말이 없다.
홀랑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면 누구나 똑같을까? 비누거품이 씻겨 내려가듯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걸까? 그래도 중요한 것은 남는다.
재성의 현재는 과거의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자신이 비관해서 버리려고 했던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다른 태도로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새 옥탑방 주인이 된 형욱은 청소부터 시작하고 재성의 배우의 꿈을 대신 일구어나간다. 아참, 눈치챘겠지만 형욱은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억상실증이 아니면 영화는 어떻게 만들까 싶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못할 때만큼 힘든 것이 없다. 잘하고 싶은 만큼 두렵고 상처 받는다. 나약한 자신을 원망하기를 반복한다. 그만둘 수도 없지만 포기하면 더 큰 아픔을 달래는데 애쓰며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런 게 꿈일까? 품고 있을 수도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는.
글을 잘 쓰려고 하다 보면 진이 빠지고, 그마저도 안 될 때는 괴롭기 그지없다. 눈이 빠질 것 같고 어깨가 욱신거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동, 오직 내가 원해서 하는 고생을 해보니 알겠다. 외롭고 불안한 싸움이라는 것을.
그래도 그런 걸 갖고 있는 사람이 ‘럭키 맨’이 아닐까? 오랜 무명의 시간을 견뎌온 유해진이 주연을 맡은 영화라 그랬을까? 단순한 코미디 영화로만 보이지 않은 이유. 어쩌면 재성에게서 심약한 내 모습을 보았고, 형욱의 강건한 의지를 닮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유해진은 조연이었던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