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혼내고 나면 죄책감이 든다. 학대라도 한 것처럼. 발단은 수건이었다. 안방 화장대에 뭉쳐져 있는 수건이 있었고, 그건 어젯밤 샤워 한 딸이 머리를 감쌌던 것임을 추측하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직 물기가 있는 그것을 빨래 바구니에 넣으려는데 화장실 앞에 하나 더 있었다.
“쓰고 난 수건은 바로 치울 수 없어?”
마침 제 방에서 나오는 딸에게 나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열린 문으로 보이는 딸의 방은 널브러진 옷, 과자봉지, 애쉬 그레이 가발까지 해서 난장판이었다. (생일 선물로 준 가발은 지금은 내 화를 돋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엉망인 네 방이 익숙하니까 거실이나 엄마 방을 어질러도 이상한 걸 모르는 거야. 그래서 수건이 안 보이는 거라고.”
전부터 딸에게 방을 청소하라고 했지만 딸은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만 걸고는 그만이었다. 자기가 쓰는 방의 청결 정도를 스스로 결정하고 감수하고 살겠다는데 내가 간섭할 권리는 없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를 해준다는 것은 자기 방도 관리를 못하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아서가 아이라 딸이 불편함을 느끼는 기회를 뺏고 싶지 않을 뿐이다. 절대로.
나도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정리라는 걸 하게 되었다. 청소하는 인생을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자로서 양심에 찔려서 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화를 낸 후가 항상 문제다. 할 말이 생각나서 말을 걸면 딸은 상처 받은 표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딸은 내가 언제 화낼지 몰라 무서워서 그렇다는데. (나는 딸이 더 무섭다)
“뭐 만들어 줄까?”
내가 (또 먼저 늘 언제나 항상) 화해를 시도한다.
“아무거나.”
“샌드위치? 아니면 갈치조림? ”
“엄마가 좋은 걸로.”
“엄마가 또 무섭다고 하려고 하지?”
수건 때문에 짜증이 나도 밥은 먹어야 하는 게 가족이다. 생활을 함께 하기 때문에 작은 습관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지만 맛있는 걸 만들어주고 싶기도 하는 존재.
“네가 먹고 싶은 걸 만들고 싶은데?”
“그럼 샌드위치 만들어줘.”
소스부터 만들었다. 머스터드 1큰술, 씨겨자 1 큰술, 마요네즈 2 큰술, 올리고당 1작은술을 섞었다. 내가 좋아하는 모찌식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계란을 부쳤다. 어제 샐러드를 하고 남은 닭가슴살을 얇게 썰어서 계란 옆에 구웠다. 익는 동안 양파, 토마토, 양상추, 피클, 치즈를 준비했다. 식빵 두 쪽 면에 소스를 골고루 펴 바르고 물기가 없는 치즈와 계란을 먼저 빵 위에 올리고 다른 재료들을 차곡차곡 올려주었다. 클럽 샌드위치가 완성되었다. 오렌지주스와 아이스티 중 뭐가 좋은지 딸에게 물었다.
“엄마 샌드위치 맛있어.”
“어제 먹어서 질리지 않아?”
“아니, 매일 먹어도 좋아.”
푸짐해서 씹는 맛이 있었다. 햄버거 먹을 때처럼 아, 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 베어 물면 양상추의 아삭함이 느껴졌다. 닭가슴살과 계란의 고소함이 이어지고 피클과 양파의 협공으로 느끼함을 잡아주면 토마토와 치즈가 비집고 들어와 풍미를 더해주는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