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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 무책임함

by 작가명 른

잔뜩 낀 먹구름이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아침이었다. 무언가를 그만둔다면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이 제격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학기의 마지막 날이어서 그랬을까. 오늘은 말하기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3명의 학생이 시험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한 명은 미얀마에서 온 메이.

“선생님, 제가 왜 한국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가 아파서 엄마가 저를 이리로 보냈는데 저는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요. 제 동생도 태국에 있어요. 우리 가족이 다 떨어져 살아요. 너무 슬퍼요. 왜 한국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시험도 안 보고 싶어요.”

한 명은 러시아에서 온 타냐

“선생님, 저는 이 대학교의 시스템이 싫어요.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러시아에 갈 거예요. 지금 컨디션도 좋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한 명은 베트남에서 온 지압

“선생님, 저는 아마 어제 시험을 못 봤어요. 그래서 말하기 시험도 보고 싶지 않아요.”

학생들을 설득해 꾸역꾸역 한 문장 혹은 두 문장을 끄집어 내 채점을 했다. 그때였다.

“누가 거기에 있는 거야? 내려 가요! 내려 가!!”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학생의 이야기를 듣던 나도 시험을 보던 학생도 잠시 소리를 멈춘다. 고함 소리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시험을 마치고 다음 팀에게 알려 달라고 하자마자 바로 다음 팀이 들어왔다. 1층에서 대기해야 할 녀석들이 빨리 시험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순간 숨이 멎는다.

“너네가 혼난 거였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아이들에게 묻는다. 어떤 불똥이 튈지 상상만으로 이미 피곤하다.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숨어 있었어요.” 학생들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어휴, 1층에 있으라니까.” 믿었던 녀석들이 이러니 내심 속이 타지만 안심이다.

‘카톡!’

이내 터질 게 터진다.

오늘 아침부터 싸한 예감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대기실에는 책만 가져가야 한다고 미리 학생들에게 공지를 했고, 확인을 한다고 했는데 나 또한 성의가 없었다. 그리고 그중 한 녀석이 걸린 것이다. 학생은 시험을 포기할 것처럼 찾아왔다.

“옷 속에 숨긴 거야?”

“아니요, 선생님 진짜 옷 속에 숨긴 건 아니에요.”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써 써 놓은 문법 정리한 한 장의 종이가 애처롭다. 그게 뭐라고. 어차피 책을 가지고 대기실에 가지 않는가.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진짜 몰랐어요.”

“오늘 일단 시험 끝나고 305호로 올라가야 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죄송하다고 해.”

학생이 다녀간 이후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학생한테 갈 폭풍과 나에게 미칠 여파가 두렵기까지 했다. 시험을 보는 다음 학생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그 아이에게 전가하면 좀 편해질까는 무책임한 생각마저 스친다. 그러다 문득. 아주 잠깐 문득.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

‘아. 이제는 정말 지친다.’

이 학교로 와서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있던가. 오랜만의 복귀라,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이라 그러려니 덜컥 덜컥 걸릴 때마다 살얼음을 지나가듯 1년을 보냈다. 2년 가까이 돼도 편치 않은 걸 보니 이제는 이 학교와 내가 잘 안 맞는 건 아닐까는 결론마저 손에 잡히듯 가깝다.

[미리 학생들에게 이야기도 했고 책을 걷어서도 확인했지만 꼼꼼하게 못 본 제 불찰이에요. 이런 상황이 나와서 너무 속상하지만 제 부주의도 있었으니 제 책임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지압이 아닌 제가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책임.

죄송합니다가 아닌 책임을 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내 책임은 더 무책임한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지친 마음은 무모한 용기를 주었다.

긴 방학이 찾아왔다.

괜찮다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아직 80장은 족히 남았을 명함에는 학교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명함 다 쓸 때까지만 이 학교에 남아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아무래도 다른 학교 공고를 유심히 보게 될 방학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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