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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두께에 눌려 괜한 선입견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책 제목만 봤을 때는 전문용어들이 쏟아질 것 같아서 사놓고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첫 장을 넘기고 나니 술술 읽히는 책이었다.
UX 디자인을 어떻게 하면 좋다, 같은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사람의 인지심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이 이 책의 주를 이룬다. 그 사례들은 일상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 잘 와 닿는다. UX를 다루는 사람이 쓴 책이라서 그런걸까?(ㅎㅎ) 그만큼 처음 UX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입문용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복잡한 게 뭐가 어때서?
이 책의 첫 장은 前 미국 부통령 앨 고어의 책상으로 시작한다. 책상 여기저기에는 책과 서류 파일들이 어지럽게 쌓아 올려져 있다. 언뜻 본 사람들에게는 복잡해 보이는 책상이지만, 책상의 주인인 그에게는 나름의 질서와 구조가 있기 때문에 그 상태가 문제 되지 않는다.
복잡함은 주관적이다. 어떤 대상이 복잡한지에 대해서는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달라진다. 복잡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알면 혼란스럽지 않다.
현실세계는 물론, 디지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도 회사 업무로 앱을 분석할 때나 평소에 사용하는 서비스에서도 '왜 이 부분을 굳이 이렇게 만들었을까?'싶은 순간이 종종 있다. 구조가 이해되지 않고 공감이 가지 않을 때인 것이다.
p.17
내가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함(Complexity)과 혼란스러움(Complicated)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복잡함'은 실재의 상태이고, '혼란스러움'은 마음의 상태다.
운전을 처음 배울 때는 시선, 양손, 양발, 자세 모든 것이 신경 쓰이고 우왕좌왕한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옆 좌석의 물건을 집거나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진다. 운전 중에 많은 복잡한 것들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세탁기를 살 때도 기본적인 세탁 기능에 집중한 세탁기를 제쳐두고 수많은 옵션과 버튼이 나열되어 있는 세탁기를 심지어 더 비싸게 산다. 복잡한 기능 때문에 이해하는 데 시간이 들더라도 더 많은 모드를 제공하는 세탁기가 고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잡함이 나쁜걸까? 복잡함이란 많은 것들을 컨트롤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상태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 복잡한지 공감되지 않을 때 '혼란스러움'이 생긴다. 바로 이 '혼란스러움'을 지양해야 하는 것이라고 책에서는 끊임없이 짚어준다.
단순화는 만능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는 가끔 간편한 믹스커피를 제쳐두고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드립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신다. 비용과 시간이 중요한지, 맛 좋은 커피가 더 중요한 지에 따라 커피를 마실 방법을 선택한다. 때로는 쉽고 단순하게 끝낼 수 있는 것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얻는 쾌감들이 있다.
단순함이 긍정적인 작용을 할 때도 있지만, 과도하면 흥미를 잃게 만들거나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여백이 많고 글자가 적은 디자인은 깨끗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혼란을 주는 경우도 많다.
단순함 = 최고의 솔루션?
제안팀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RFP를 보다 보면 '단순화', '미니멀 디자인' 등의 문구가 자주 보인다. 그 뒤에는 '심플'이라는 키워드도 자주 따라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기능이 마냥 단순하지는 않다. 개인화된 메인을 보여주어야 하고, 보여주고 싶은 정보도 많고,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이벤트도 있어야 한다.(업종을 불문하고 룰렛 게임은 단골 이벤트 콘텐츠다.)
보여주고 싶은 건 많은데, 무조건 단순화하고 생략해서 심플하게 만드는 게 좋은 방법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궁극적으로, 단순함은 복잡함의 반대말이 아니다. 따라서 복잡함으로 인해 생기는 혼란스러움을 해결하기 위한 만능 솔루션도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복잡함은 물리적 상태이고 단순함은 심리적 상태라고 말한다.
결국 수많은 사용자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단순함이란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형태가 아니라, '사용하기 쉽다고 느껴지는' 심리적인 형태를 일컫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물론 시각적으로도 쉽고 심플해 보이면 베스트겠지만, 복잡한 정보와 기능들이 얽혀 있어도 사용하기 쉽다면 그것도 단순한 디자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비스는 내가 만들게, 불편한 건 누가 할래?
p.85
모든 프로그램에는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잡한 정도, 즉 복잡함의 하한선이 있다. 이때 던져야 할 질문은 이 복잡함을 누가 감당하느냐는 것이다. 사용자인가, 아니면 개발자인가?
*여기서 '개발자'는 코드를 다루는 개발자 외에도 제품・서비스를 만드는 모든 포지션으로 이해하고 썼습니다.
보통은 모든 사용자의 케이스를 고려하고, 사용자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친절한 장치들을 제공하려면 개발하는 데 품이 많이 든다. 반대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사용 프로세스 위주로 개발하고 나머지는 단순 오류로 처리해버리면 개발하기는 쉽지만 사용자는 힘들다.
몇 년 전, 카림 라시드(Karim Rashid)라는 디자이너의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쓰레기통이 있는데, 벽에 걸 수 있는 고리가 있는 쓰레기통이었다. 제작되는 과정도 단순해서 대량 생산에도 유리하다고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만들기도 쉽고 생긴 것도 고리 외에는 별 다를 게 없었던 그 쓰레기통을 보며 당시에는 오만하게도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걸까?'하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고 조금 지나서야, 문득 그 쓰레기통이 사용자에게도 편리하고 만드는 사람(개발자)도 편리한 몇 안 되는 대단한 쓰레기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같은 에이전시 내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 중 간혹 사용자를 위한 UX가 아닌 클라이언트의 CX(Client's eXperience), 또는 개발자의 DX(Designer/Developer's eXperience)가 우선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여기서도 '경험'이라는 단어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임을 맞춰보았다.)
물론 현실적으로 일정 내에 개발되기 힘든 기능들은 요구사항 정의 시점부터 배제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수행팀에서 조금만 더 신경 쓰고 클라이언트가 조금만 당장의 수익을 양보해서 사용자 입장을 배려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결국 결과물을 평가하는 것도, 그에 맞는 수익으로 돌아오는 것도 사용자에 달려있을 테니까.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는 참 복잡하게 살고 있구나,였다. 그리고 '복잡함을 관리한다'는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었다. UX라는 단어에 많이 노출되어 있던 나에게 있어 아주 새로운 내용을 배웠다기보다는 모호하게 잡혀있던 인지심리학에 대해 구체화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앞서 소개한 내용은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초반 내용을 중심으로 리뷰했다. 그 뒤의 내용은 복잡함을 관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알려준다. 개념적 모델부터 사회적 기표, 위로 소음, 희망선, 대기열 등 중요한 내용들이 많지만, 그런 정의가 내려지는 항목들보다는 이 책을 다 읽는 데에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복잡함과 단순함에 대해 집중해서 리뷰를 쓰고 싶었다.
단순함과 복잡함 사이의 사용자 심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전략을 배우기에 좋은 책이다. 공부하듯이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 편안히, 너무 머리를 쓰면서 이해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덤. 다만 디테일한 방법론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추상적이고 너무 광범위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