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고 진했던 첫 사회생활의 기억
성격이 능력 되게 하라!
대학교 때 신도시에 입점된 은행에서 홍보 아르바이트를 방학 기간 동안 한 적이 있다...
주로 은행 안에서 홍보 전단지를 수천 장 접어서 봉투에 넣고 풀로 붙이고, vip 사은품을 포장한다거나, 은행장님의 구두를 닦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은 전단지를 들고나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홍보하는 일을 했다.
하루는, 무더위 땡볕에 내 몸이 녹아내길 것만 같은 날씨였다. 그때 전단지를 각 사람당 수백 장씩을 들고 관광지로 나갔다.
두 팀으로 나뉘어서 나갔는데 한 팀은 저 쪽, 우리 팀은 이쪽으로 전단지를 돌리는 계획이었다.
우리 팀의 보스는 내 기억에 과장님이었고
상대 팀의 보스는 과장님 아래의 차장님이었다.
성실하고 정석대로 일을 하시고, 융통성은 없으시고 말이 없으신 과장님을 따라서 나와 친구는 말 한마디 없이 동네 집, 상가, 행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성실하게 하루 종일 땡볕에 전단지를 돌리고 홍보를 했다. 물론 거절도 많이 당하고(거의, 반이상 외면), 관리 아저씨한테 쫓겨나기도 하고, 돌려도 돌려도 끝나지 않는 수백 장의 전단지를 품 안에 안고, 우리 팀은 언덕배기 집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을 했고, 마감시간에 돌아오면서도 일을 다 끝내지 못해서 남은 종이뭉치를 한가득 안고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우리 팀에 비해, 상대팀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그 많던 수천 장 되는 홍보지는 다 나눠주고 왔으며, 여유 있게 관광도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물고 먹으면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그날 아침 홍보하러 출발하기 전에 상대팀 사람들이 왜 나를 측은하게 여기고 고생하겠다고 했는지.)
나는 차장님에게 다가가서 어떻게 일을 하고 오셨는지 여쭤봤다.
상대팀 차장님은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차장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에너지가 넘쳤고 웃음이 넘쳤고 활력 있게 일이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차장님은 관광 오신 성격 좋은 이모님들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고, 한창 수다를 떨다 보니 고객분들이 오히려 '무슨 일로 나오셨어요?'라고 물어보더란다. 그래서 신도시 은행에서 홍보 나왔다며 날씨가 좋고 관광하시는 손님들이 많으셔서 일부러 찾아뵙고자 나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헤어지실 때 고생한다며 전단지를 뭉탱이로 가져다가 이쪽저쪽 고속버스에 다 돌리고, 일행들에 돌리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몇 팀을 만나 한 바퀴 관광도 하고 오시고, 다니면서 아이스크림도 사서 드시고 단합대회를 하고 오신 모양이다.
홍보지는 홍보지대로 다 나눠드리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관광도 하고 팀워크도 다지고, 사람들은 역시 차장님이라며 치켜세웠다.
우리 팀은 조용히 찌그러져있었다.
과장님은 정말 말수 없고 오로지 성실하시고 정석대로 홍보지를 한 장 한 장 돌리라고 하셨다.
(물 한 모금 안 사주시고)
그렇게 하기에는 사회 초년생인 나와 친구가 수천 장을 5-6시간 안에 다 나눠주기가 어려웠다.
나는 첫 사회생활에서 그 두 분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성실함은 물론 기본 장착되어야 하는 미덕이나, 그때에도 이미 무조건적인 성실함은 답답함으로 비쳤고,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내가 가진 재능이든 능력이든 장끼이든, 있는 거 없는 거 총동원에서 나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도, 능력이었던 것이다.
내가 사회생활할 때도 그냥 성실하기만 한 후배가 있었다. 일을 시키면 시키는 일만 하고(그나마 잘하지 못하고) 전후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자꾸만 일이 생겼다. 그러다 울고 앉아있던 후배를 보았다.
"힘드니?"
후배는 울기만 했다. 나는 안타깝지만, '착하기만 해서는 일을 배울 때 힘들어. 성경에도 뱀보다 지혜롭게 하라는 표현이 있어'라고 말해주었다.
차를 타라는 것이 아니라, 선배들이 바쁘고 힘든 중에 차 한잔씩 돌릴 수 있는 센스.
분주하고 짜증 나는 틈에 생기 있는 말투로 분위기에 산소를 더할 수 있는 위트.
모두가 지쳐 앉아있을 때 벌떡 일어나 왓츠 업을 외칠 수 있는 똘기. 막내일 때는 그것도 능력이고 센스이고 재능이다. 그럴 때는 실수도 용납되고 기회를 더 주고 싶다. 인지상정인지라.
그렇게 눈에 띄다 보면 일머리도 생기고, 일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자신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영민함.
사회생활은 사회에 나가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나의 가치와 능력을 드러내는 일이다. 내 성격 그대로 나가서 주어지는 일을 가만히 하고 출퇴근하는 행위는 진정한 사회생활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에서 나의 생활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내 존재가 미약하고, 내 시작이 미약하여 모든 사람이 내 편일 수가 없다.
내 편을 만들어가고 확장해가는 것,
내 무기를 키워가고, 내 영역을 만들어가는 것,
내 소양과 자질이 날로 자라 갈수록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그때에야 비로소 이런저런 생활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주변의 사람들을 원망하기 쉽지만, 분명 해결점도 내 안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노력하기 까지 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회생활은 나의 생활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일'이고 공적인 업무이다. 나의 성격 속에 갇혀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우린 사회생활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