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과제 제출 기간에 내 생각이 그쪽으로 향하다 보니 지나가는 간판에 이런 글자가 보였다.
"여성시대의 상실"
저게 무슨 뜻인가 하고 다시 가만히 보니 <여성시대 의상실>이라는 간판이 걸린 옷가게였다.
또 어느 학기 중에는 성교육을 받고 집에 와서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신문에는 굵은 헤드라인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성적 비관으로 자살'
나는 그것을 "성(性)적 비관으로 자살"로 느꼈고
기사 내용을 보니 어느 고 3 학생이 자신의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내용을 보고서야 내가 잘못 판단했음을 알았다.
작년에 길을 가다가 지인들과 무슨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는데 내 눈엔 어느 고깃집의 간판이 이렇게 보였다.
<백수거든>
다시 보니 고깃집 간판은 <백수 가든>이라고 쓰여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순간적으로 글자마저 다르게 보이고, 받아들이기에도 다른 의도로 들릴 때가 많다. 내가 알게 모르게 내 맘속에 고깝게 들렸던 소리들도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데로 들렸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내 생각이 나의 감각과 감정에 선입견을 씌우고, 나는 그 프레임 안에서 전혀 다른 의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몸이 아플 때에는 나의 상황을 '아픈 사람'의 모드로 받아들이지 않길 바라며 노력하고 있다.
마음을 강하게 먹고, 약한 소리 하지 않고, 섭섭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될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야겠다. 괜한 호의나 배려를 기대하지 않고, 선의는 선의로 받아들이고 적당한 무관심도 당연한 것으로.
나를 위해 배려하고 온전히 나를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부모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나를 진정 배려하지 않는 순간이 있는데 남들이 나를 항상 배려하길 바라는 것은 억지이므로.
무심히 뱉은 지인의 말을 며칠 곱씹으면서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니 오늘쯤에는 별일 아니게 느껴지는데, 그 당시,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산뜻하게 잊히지 않았다.
이제는 괜찮다. 때론 나의 판단이 내 이성보다 앞서 나아가고 감정에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서, 괜한 생각들은 잊히도록 마음먹었다. 내 감정까지도 성숙하게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경지까지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