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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Feb 01. 2020

이번 생은 '안'망했습니다.

방송작가로 일할 때 다른 작가에 비해 내 경력은 생방송 프로그램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다큐멘터리로 전향(?)했었다.

글에 대한 나의 순발력과 속도는 생방송 프로그램 작가로 일할 때 많이 길러졌었고, 다큐멘터리 글을 쓰면서는 내 입으로는 민망하지만, 글의 깊이가 달라졌다. (정말 쥐구멍이든 개구멍이든 파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쥐구멍 개구멍 말고 무덤까지 파고 들어가고 싶은 글을 옛 일기장에서 발견하고는 나는 하루 종일 부끄럽고 오글거려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당시 '생방송'에 연예인이 아닌 보통의 우리 이웃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와 장기를 겨루는 국내 유일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생방송 전에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리허설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일기 속에 남아있었다.

  
“무대에 선 이상 여러분들이 주인공입니다. 생방송 큐 싸인 들어가면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대 아래서 발동동 구를 수밖에.. 무대 위로 뛰어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잘해주세요. 무대에 선이상. 다른 팀, 다른 경쟁자들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내가 주인공이다 생각을 하세요. 좀 틀리면 어떻습니까, 실수하면 어때요,
씩씩하게 용감하게 하세요. 여러분이 지금껏 준비해왔던 것 잠시 후 생방송 때.. 딱 1시간이 주어집니다. 그 이후엔 바로 스튜디오에 불 꺼지고 모든 카메라 장비들, 조명들, 세트 모두 해체됩니다. 무대 아래서 열심히 손뼉 쳐주고 환호하던 방청객들도 모두들 등 돌리고 스튜디오 밖으로 빠져나갈 거예요. 그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허무함이 밀려올 수도 있어요. 이제 끝난 건가.. 그렇지만 열심히 후회 없이 하고 나면 잘 해냈다는 성취감과 기분 뿌듯한 느낌이 들 거예요. 가슴도 벅차고 함께 온 가족들을 끌어안고 등 두드려줄 수 있게 될 겁니다.
방송엔 미인보다 잘 웃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멋있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주인공이란 걸 명심하세요. 그리고 최선을 다하세요. 방송 마치고 나면 1등 못한 아쉬움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많다고 얘기들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전화하지요, 작가님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세요, 다음엔 더 잘할 자신이 있어요….. 그러나 다음번에 기회는 없습니다. 기타 등등…”

, 정말 땅 파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인생의 '인'자도 살아보지 못했던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인생의 연륜을 파노라마로 겪어오신 분들을 상대로 생방송 전 리허설이랍시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부담을 드렸다는 것이 부끄럽고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너나 잘하세요'라고 해주고 싶은 내 젊은 날의 일기.


방송은 '인생'과 참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한때 내 닉네임이 '인생은 생방송' 이기도 했다.

다시 녹화를 할 수도 없고, 돌이켜 수정할 수도 없고 못 먹어도 GO 해야 하는 실시간 인생 라이프의 속성은 생방송과 닮아있다. 사전에 취재하고 녹화 대본을 만들어둔다 하더라도 실제 생방송에서 인터뷰가 단축되기도 하고, 장기가 부각되기도 하고, 다른 팀과의 시간 배분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날 방송의 무대는 단연 돋보인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우승자가 되고, 격려의 상을 받고, 응원과 질타의 방송 소감이 쏟아지기도 했다.


나의 인생 무대에서 NG가 많이 났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순간,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었던 순간, 차마 채널을 돌려버리고 싶은 순간도 내 인생 내 무대에서 많이 보였다.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독립이란 것도 해보고, 가장도 되어보고, 부럽다는 소리도 들어보고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고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왔다.

아프기도 하고, 아픔을 위로받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든 나를 향해 달려와주기 원하는 나의 아군들도 전국구에 흩어져있고, 가장 위대한 사실은 내게도 독자님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펜이 되어 독자님의 덕후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작가님의 덕후로 그분들의 글이 떠오르길 해님을 기다리듯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이번 생은 '안'망했다.

망했다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망하지 않았다는 기회의 의미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생방송으로 카메라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이고, 나를 알든 알지 못하든 그들은 나에게 많은 응원을 보내면서 내가 잘 살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친정엄마가 자주 하시는 표현이 있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너무 많아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잘 될 때 응원해주고 축하해주고, 계속 잘 되길, 그런 바람으로 살아간다고 나는 믿는다. 배 아파하는 사람은 나에게 '좋은 사람'에 들지 않는 분들이고 어차피 깊은 관심도 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다.

내가 타고 가야 할 버스가 지나쳐버리면 뒷 꽁무니라도 지켜보겠지만, 어차피 내가 탈 버스가 아니라면 지나가건 말건 쳐다도 보지 않듯이.

그러니 나도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내 가족 배고픈 것 채워주기만도 바쁜데 남들 배 아픈 것 까지 쓰담 쓰담해주지는 못하겠다. 다만, 나를 향해 응원해주는 분들에게는 나 또한 그분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빌어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실수하면 어때.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한 때 어느 연예인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매장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모 아나운서 께서 끝까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하셨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잖아요."


모두가 돌을 던지고, 모두가 외면할 때

어느 한 사람

'실수를 할 수 있다'라고 너그럽게 내게 기회를 주고 믿어주는 어느 한 사람만 있어 이 세상에서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누가 뭐라든, 우리의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다!


'실수해도 괜찮아?' by 아인잠's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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