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일기를 쓰는 게 언제부터인가 유행이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감사를 하면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긴다고 한다. 마음도 행복해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생겨난다.
실제로 나도 그렇다. 몸이 아프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면서 밥 먹는 것도 감사, 말하는 것도 감사, 숨 쉬는 것도 감사, 볼 수 있는 것도 감사, 모든 게 감사했다.
내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도 감사,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도 감사,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도 감사, 아침에 깨서 밤에 잠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쓰면 감사할 이유가 되었다.
감사란 그런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찾을 수 있는 제목이 되는 것. 어떤 문제라도 감사할 부분을 찾으면 찾아지는 것, 감사를 해야 더 감사하게 되고 사람은 감사를 통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겸손한 분들, 성공한 분들, 만나본 중에 닮고 싶은 분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감사인사를 잘하셨다. 정중하고 예의 바르시고 사람에 대해 인격을 갖춰 대하시고 묻는 말에는 지극한 정성으로 대답을 해주셨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실제로 성공한 분들을 보면 고개를 잘 숙이셨다. 인사할 때 나보다 더 고개를 숙이시는 어른도 계셨다.
그런데 감사를 복 받는 주문쯤으로 여기는 지인을 만나고 나니 마음이 탈탈 털리고 온 기분이다.
감사란, 더 많이 감사하고, 감사하는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의미에서 기록하고 말하는 것이 상식선 아닐까.
"감사하는 삶을 일상에서 가장 쉽게 실천하면서도 큰 효과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감사일기를 습관화하는 것이다."
- <쓰면 이루어지는 감사일기의 힘> (애나 김)
"매일 감사일기를 쓰면서 내 삶에 일어난 긍정적 변화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여전히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과 원망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평온을 찾고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감정에 주도권을 내주고 이에 휘둘리기보다는 내가 주인이 되어 내 감정을 컨트롤하는 느낌이랄까."
감사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감사, 내 감정을 주도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감사하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는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지인의'감사하라'는 말에 갑자기 짜증이 났다.
자기는 안 하면서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모습이 꼰대 같아서. 나이도 같이 먹어가는데 남편 있다는 이유 하나로 아주 애 가르 치듯 인생을 들먹거리는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그러다 대화의 끝에 그녀는 나에게 행복하고 싶으면, 성공하고 싶으면 감사할 거리를 찾아보라고 했다. 어이가 없다. 정말.
그래, 감사해야지, 나도 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할 지경이다.
안 보고 살면 좋겠는데, 좋은 마음으로 만나보려던 나의 오지랖에 감사. 그 덕에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네 속이라도 시원하게 해 줬다면 그걸로 감사.
눈에 뵈는게 없어 감사 by 아인잠's girl
예전에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옛날에는 콩나물을 방 안에서 키우는 집이 많았는데 콩나물에 물을 붓고 그 위를 검은 천으로 덮어 놓으면 콩나물이 자란다는 것이다. 물만 먹고 자랄까 싶어도 희한하게 쑥쑥 자란다는 말 끝에 교수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밤에 가족들은 다 잠이 들었는데 단칸방에 혼자서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하면 콩나물에서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콩나물이 자라고 있는 바구니 아래를 테이프로 감싸 놓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시기 전에 테이프를 제거하고, 밤만 되면 테이프로 다시 막아놓는 생활을 반복했더니 어느 날, 콩나물이 다 썩어있더라는 것이다. 콩나물이 제대로 자랄 리도 없고, 먹을 수도, 팔아버릴 수도 없는 채로 콩나물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 공부는 참 잘되었다고 했으나, 콩나물 농사를 망쳐 밥벌이 방법이 없어진 어머니는 며칠 난감해하셨고 남의 집 밭에 나가 일하셨다고 한다. 한 겨울에 밭일도 없어 고작 허드렛일을 해서 식구들 끼니를 때울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거칠고 터져버린 손등을 보면서 교수님은 뒤돌아 많이 우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공부하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혼내지도 않으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넘어갔으나, 돌아가시면서 그때 일에 대해 오히려 사과를 하셨다고 한다.
"그때 형편이 어려워서 제대로 공부도 못 시키고, 콩나물 물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싫었으면 테이프로 감아놨었을까, 엄마가 그게 미안해서 눈을 못 감을 것 같아. 미안했다... 그리고 훌륭하게 커주어서 감사해..."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아들에게 건네신 어머니의 사과와 어머니의 감사는 교수님의 뇌리에 평생에 떠나지 않는 그 시절 괴롭기만 했던 '물소리'와 함께 남겨졌다.
이후 교수님은 감사할 줄 알게 되는 사람으로 바뀌셨다고 한다. 누군가의 진정한 감사는 옆에 있는 사람을 물들이고 변하게 하는 마법도 있는 것 같다.
감사란 종이에 매일 적는다고 감사해지는 것이 아니라(물론 기록의 중요성, 효과는 인정한다.) 내가 생각하는 감사란, 콩나물이 자라면서 들리는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 같은 거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가면서 내가 성장하고 내 인생이 뻗어나가는 소리, 나의 키를 키우고 나의 내면을 넓히고 다른 이들에게 이로운 존재로 커져가는 소리, 규칙적이고 반복되는 소리, 내 마음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나의 감사로 누군가에게 울림이 되는 소리. 감사의 말을 테이프로 막아버리면 내 마음이 속에서 곪아버릴 소리. 그래서 계속 표현하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는 소리.
물이 콩나물을 키우지만, 교수님도 물소리로 성장하셨다. 삶 속의 감사는 그렇게 내 삶을 적시고 성장해나가는 물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감사의 말을 하라는 '조언'이 듣기 싫었다기보다, 무분별하게 주문처럼 외우고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이 개운하지 않다.
욕심은 욕심껏 테이프로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는다. 감사도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는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감사는 눈으로, 입으로, 얼굴로, 손짓으로, 내 발걸음에, 나의 웃음에, 나의 눈물에 어린다.
감사하다. 감사하다는 예쁜 말이, 감사하다는 적절한 말이, 감사하다는 충분한 말이.
내 삶의 감사 제목은 내가. 너의 삶의 감사는 네가 책임지는 것이 제대로 된 감사지. 내 감사까지 그대가 이래라저래라 내 상 위에 감 놓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