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흠모해마지않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몇 년 전에 몰아서 본 적이 있다. 독서를 하면서 지내다 보면 책에서 공통적으로 자주 보이는 이념이나, 가치, 작가, 책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때 우연히 골랐던 책에서 4번이나 거론된 이름이 '황현산' 선생님이었다. 어떤 분이기에 내가 보는 4권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할까, 꽤 늦게 황현산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는 그분의 글을 흠모하고, 그분의 삶과 인격과 이름 자체도 흠모하게 되었다. 이름까지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것 같은 저자가 내게는 황현산 선생님이시다.
그분의 저서 <밤이 선생이다>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등장한다.
"한국의 모든 남자들이 군대 외상으로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 복무가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 행복은 가산점 같은 면피 수준의 제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국에 긍지를 느끼고 복무기간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도 삼을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결혼 외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감히 덧대어 그당시 생각나는 대로 써본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한국의 모든 여자들이 결혼 외상으로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 생활이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 행복은 육아지원비 같은 면피 수준의 제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에 긍지를 느끼고 결혼 기간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도 삼을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롯된다."
결혼에 긍지를 느끼고, 결혼기간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으려면, 환경적인 뒷받침도 필요하지만, 본인이 자각하고 개선하기 위한 대단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결혼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선택한 것인데, 그 '행복'이라는 것이 파랑새와 같아서, 어디에 있는 건지 찾아 해메어도 볼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애써 찾고 이름을 붙이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늘 내 주위에 공기처럼 있으면서 내 주변을 감싸지만, 내 마음이 지옥일 때는 그 행복이 보이지 않았다. 흔히 쉽게 하는 말이지만, 행복은 어디에나 있고 마음먹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맞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에서 저자는 여러 분야에서 목표를 이룬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통점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나는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었다.
황현산 선생님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할 것을 강조하시며 배우기를 멈추지 말고 참신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게 책을 읽는 것이라고 하셨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문명이 자리잡기 시작할 때 나온 책들이거든요. 고전은 생산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인생 전반에 관한, 세계 전반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깊이 있고 폭넓게 사유하게 하고 창조적인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계발서는 그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사안들, 오직 눈앞에 있는 문제, 눈앞에 놓인 욕망, 눈앞에 있는 사회의 요구와 연결되어있지 않습니까"
인간 자체가 자유롭게 되기 위해 고전을 읽는 것이라는 황현산 선생님의 말을 나는 마음에 새겼다.
결혼 외상으로 힘들 때 책을 읽었다. 고전을 읽으면서 나의 현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현실'에 대한 황현산 선생님의 글은 나를 현실에서 끌어올려 내 삶을 자각하게 만드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 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지지고 볶고 들볶이며 마음이 쑥대밭이 된 나의 현실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선생님의 글이 다가왔다.
선생님은 마치 내 상황을 '눈 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라고 위로해주시는 것 같았다. 내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도 현재이지만,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이나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머리가 날아가고 다리에 총알이 날아와 꽂히는 그때도 현재였다.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엄마나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찾아 헤매며 절규하는 아빠의 고통도 현재였다.
누구의 고통이 더하고 덜한가에 대한 비교는 필요치 않다. 현재의 고통이 비록 목을 조를지라도 그것은 내 눈앞에 '보자기만 한 시간' 이리라 관망할 줄도 알며 고통에 목매이지 않는것, 그 고통의 시간에서 빠져나와야만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서 그 이후, 나는 힘들 때 고전을 읽는다. '인류문명이 자리잡기 시작할 때 나온 고전을 읽으면서 내 손바닥이 아닌 인생 전반에 관한, 세계 전반에 관한 문제를 사유하다 보면 그 깊이와 넓은 폭안에서 자유와 위로를 경험했다.
살아가는 내내 내 눈앞의 고통을 볼 것이 아니라 넓은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며 그 안에서 진정한 나의 삶과 꿈을 찾아가기를. 나는 황현산 선생님의 높고 깊은 뜻을 헤아리려 수많은 행간 속을 누비고 다닌다. 여전히.
이제 내 현실은 손바닥만 한 고통이 느껴지더라도 손바닥을 뒤집어버릴 수 있다. 내 의지로.
설령 힘든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처럼 두렵고 헤맬것 같지않는 자신감 역시 '책'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삶은 늘 동전의 양면처럼 나에게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서 책을 읽게 된다. 책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자유와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책은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