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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Feb 25. 2020

비교를 하면서 일어나는 일

오늘 모임에 나갔다가 멤버 중 한 분께 좋은 말씀을 듣고 오는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흔히 나이 40을 불혹의 나이라고 하는데 '미혹'의 나이가 아닌가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정체성에 대해 불안하고 확인하고 싶은 나이, 결과에 흔들리는 나이. 주변의 이야기에 흔들리고 보통은 갱년기가 올 수 있는 나이. 불안하고 우울해서 공황장애도 많고 이는 기질, 환경, 나이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셨다.


이런 제2, 제3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면 운 좋게 50대에 이르러 지천명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나, 나의 40대의 상황을 보건대, 지천명도 쉽지 않을 듯하다.

다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에는 벌써부터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 딴에는 한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나의 삶이 어리고 여리고,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치고 단단해져 가다 보면, 인생 60쯤 되면 좀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60이 와도 좋을 것 같고 기다려진다.

지금은 지금대로 좋다. 뭔가 아직은 도전해봐도 되는 나이. 꿈을 꾸는 나이. 힘도 있는 나이. 부지런히 일하면 굶어 죽지는 않으니, 이 40대의 시간들을 뭐라도 해서 굶어 죽지 않을 뿐 아니라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살릴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싶다.


40대의 '미혹'이란 어떤 감정일까.

나와 다르게 다른 사람들은 몇 평의 집에서 살아가는지, 통장 잔고는 얼마인지, 시댁에서 물려받을 재산은 얼마인지, 남편은 얼마나 잘해주는지, 아이들은 얼마나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지, 학교는 명문대를 가는지, 애인들은 잘난 집 자식들을 만나는지, 사실 비교하자면 끝도 없는 것이 '비교'인 것 같다. 그래서 이름하여 '비교 병'이란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당신만 몰랐던 스마트한 실수들> 책에서 비교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조언의 글이 나온다.

"비교 병과 완벽주의는 조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유의하자.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사고방식을 고수한다면, 결국은 정말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극단적인 생각 대신 이렇게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비록 전부가 아니라도 현재 상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이렇게 바꿔 생각하면 비교의 기준이 바뀔 것이며, 그러면 좀 더 발전할 수 있게 됨으로써 결국 비교하는 방법이 향상될 수 있다." (224p)


나는 얼마나 비교에 영향받을까?


저자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자신이 비교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는 본인이 잘 알고 있다. 자신을 특정인이나 좋았던 시절 또는 이루지 못한 꿈과 비교할 때, 그 비교가 당신에게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하는가 아니면 좌절시킬 뿐인가?"


성장과정에서 끊임없이 비교당했던 친구는 또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라는 것을 보았다.

성장과정에서 비교당한 적이 없는 나는 살아오는 과정에서 누군가와 비교하며 힘든 적은 없었다. 나는 비교 이전에, 상대를 인정하고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온 경우였다. 비교하지 않음은 비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서가 아니라 '비교'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간파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비교한다고 떡이 나오지도 않고 되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중학교에 입학을 하니, 가정환경을 조사한다고 집에 있는 물건에 동그라미를 표시하라며 인쇄물을 나눠주셨다. 나와 비슷한 연배라면 아마도 그 종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희미하게라도 기억하는 분도 많을 것이다.

표시할 것 중 기억나는 항목은 자동차, TV, 전화기, 세탁기, 침대, 내 방(책상이었나?) 정도였던 것 같다. 그나마 그 시절에는 '컴퓨터' 항목은 없었다.

나는 인쇄물에 표시를 하면서 그래도 'TV, 전화기, 세탁기'는 있으니 우리 집 형편은 보통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고 말았는데 친구들은 이미 앞, 뒤, 옆 친구들의 호구조사를 하며 누구 집에 뭐가 있고 없는지 비교하며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모든 항목에 동그라미를 친 녀석을 중심으로 교우관계(?)가 형성되었다. 내 눈에도 우리반 반장인 그 친구가 참 유복해 보였다. 항상 옷에는 어른들이나 할 것 같은 고급 브러치가 달려있는 걸로 보아서 엄마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써주시겠다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 펜이 바뀌고, 항상 못 보던 노트나 필통을 들고 다니는 걸로 보아서 부모님께서 자주 사주시겠다 생각했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눈요기를 했고 세상에 이런 신기하고 좋은 물건들이 있구나 하고 흥미로웠다.

키가 비슷해서 항상 앞, 뒤, 옆에 앉아 1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그 친구가 참 좋았다. 잘난 척하지 않고 항상 주변을 즐겁게 해 주면서 웃음 짓고 있는 아이. 내 비교대상은 누가 친절한가, 누가 착한가, 누가 배려심이 돋보이는 가, 누가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는가 였다. 그런 비교는 나를 즐겁게 했다. 동화책을 분류하고 읽으며 자라는 동안 나는 각 사람마다 갖고 있는 인생 스토리와 매력, 특히 자기만의 특정한 어려움과 버릇, 취미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화 속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의미 있게 나오기 때문에 나도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 소풍 때였다. 당시에는 반장, 부반장의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의 김밥과 간식 등을 챙기셨기 때문에, 반장이었던 그 아이가 하교하며 학교 공중전화에서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아마도 엄마가 담임선생님의 김밥을 준비하기 싫다고 하셨던 모양이다.

그 친구는 학교 1층 현관 앞에 있는 공중전화기를 붙들고 엄마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엄마, 이번 한 번만이요, 그럼 어떡해요, 한 번만 준비해주세요, 바쁘신데 죄송해요, 엄마, 제발요"

나는 그때 알았다. (혹시 콩쥐팥쥐, 신데렐라, 심청전, 백설공주에 나오는 것처럼 별로 안 친한 계모인가?)

그 아이에게도 말 못 할 어려움이 있었겠다는 걸.

만약 우리 엄마라면 내가 반장이라 도시락을 싸야 된다고 하기만 하면, 두 첩 세 첩 바리바리 싸주셨을 것이다.

학교 다니는 내내 반장을 하며 선생님의 김밥과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를 맡으셨던 그 친구 어머니는 그런 일상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겠다 싶다. (정확한 내막이야 모르지만...)

그 이후 나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을 내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나름 어린 마음에 했다. (이 조차 판단인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비교로 인한 혼란은 없었고 다만 책을 읽으면서 '비교를 해야 한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노력하기 이전의 나와 노력한 다음의 나'를 비교하라는 말을 따르고자 했다.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만 비교해봐도 확연히 다르다.

작년 2월에 나는 이 시간이면 힘든 저녁을 물리고 겨우 안방 화장대 앞에 앉아 언제 꺼질지 모르는 노트북에 나의 글을 쓰고 있었다. 그 덕분에 타자실력은 빠르고 정확해졌으며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 계속해서 단축키로 '저장하기'를 누르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 드라마를 보았다. 두 연인의 사랑이 식어 소원했었는데 남자가 다시 한번 더 여자와 만남의 기회를 갖기 원했다. 여자는 계속 남자를 뿌리치다가 결국엔 혹시라도 세월이 지나 후회하지 않도록, 그와 '첫날밤'을 보낸 그곳 그 '방'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날 밤을 함께 보내고 다음날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고 이별을 선언했다.

'그때의 방과 지금의 방은 같은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교를 할 때 상대방에 대해서는 온갖 긍정적인 면만 강조하고 당신에 대해서는 모든 긍정적인 면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비교 시, 상대방과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공정하게 비교하는가?" (217p)


굳이 비교를 해야 한다면 제대로 비교를 해서 자신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더 나은 상황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비교도 비교 나름이다.

'그 친구는 키가 작고 나는 크다. 그 친구는 애교가 많고 나는 진지하다. 그 친구는 여리고 나는 용감하다.

그러니 키 큰 내가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친구 덕분에 웃음이 많아져서 좋다. 가끔 나의 진지한 생각을 들으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그 친구는 좋아한다. 그 친구는 여리니 용감한 내가 지켜줘야겠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이유는 나보다 잘난 것이 고까워서 말로 할퀴는 경우이다. 그 상처는 상대보다 나를 더 할퀴는 경우가 많다. 내내 친구의 친구를 비교하던 내 친구는 20년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힘들어하다가 연애하면서 상처가 회복되었다. 그건 또 다른 자만심이었다. 친구는 연애도 못하는데 나는 연애하니까, 우월해져서 그동안의 열등감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비교도 가지가지, 열등감도 가지가지.

나의 행복은 셀프, 너의 행복도 셀프, 다만 우리는 셀프서비스 앞에서 다음 사람에게 양보하기도 하고 전달하기도 하면서 마음을 나눌 수 있다.

힘들 때 서로 기대라고 있는 것이 사람인데 기대는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은 상대방을 힘껏 받쳐주는 것 아닐까.

쓰러질 것 같을 때 어깨를 받쳐주고, 넘어질 것 같을 때 등을 내어주는, 평생의 동무,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기를 40대에도, 50대에도, 60대에도, 70대에도, 나는 희망할 것이다.

가장 멋진 건, 내 나이 60, 70이 되어서도 20, 40, 60대의 친구와 사귀는 것이다.

나이를 뛰어넘는 소통과 교감, 책과 글로 인연이 닿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와 친구가 되어 주시는 40, 50, 60, 70대의 독자님들'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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