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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Feb 22. 2020

나의 수업시간에는 돈이 오고 간다.

돈이 오가는 아름다운 관계

나의 주업인 독서논술 시간, 아이들과 수업하다 보면 언젠가부터 느껴지는 게 있었다.

"지금부터 이러이러한 글을 써보도록 하자" 하면 '내가 왜 써야 하는데요' 하는 눈빛으로 앙탈을 부리는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고, '이거 쓰면 나한테 뭐가 좋은데요'하는 의심스러운 마음도 느껴진다. 해봤자 고칠 것 투성이고 자기 딴에 성에도 안 차는 글을 수업시간에 쓰고 앉아있으려니 자괴감이 드나 보다. 머리가 커질수록 골치 아픈 내색을 하며 겁도 없이 쓰니 마니 할 때, 나는 아이한테 말한다. 선생님은 자원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수업비를 받고 일을 하는 것이고, 너희들은 선생님의 귀한 시간과 재능을 받고 있는 것이니, 억울하게 생각 말고 좋은 말할 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쓰기 싫으면 집에 가도 좋은데,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오늘 쓰는 게 좋을 거야, 다음 시간에 다시 와봤자 써야 할 과제 두배로 늘어날 테니.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냉정 한 지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내 자세를 냉정하게 한다.

인생은 거저 받을 수가 없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 당장엔 대가가 느껴지지 않더라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 너희들의 노력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시간을 그냥 헛되게 보내는 것이지만, 이 순간에 열심히 수업하는 선생님은 헛되지 않아서 이 경험이 선생님의 경력이 되고 자산이 되고 능력이고 실력으로 쌓일 것이다. 선생님만 좋은 일 시키고 가면 너희는 자원봉사하고 가는 것이고, 선생님 집 전기세 내주고 가는 것이니 고맙게 여길게. 다만 이왕 수업 계속할 거면 너희도 무엇을 배워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안 할 거면 다른 선생님 알아보기 바란다.


나는 수업하는 내내 세뇌를 시키며 한두 달 겪어보면 내 앞에서 쓰니 마니 해봤자 득 될 것 없다고 포기한 아이들이 열심히 수업에 따라오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노력한 아이한테는, 노력한 만큼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돈으로!!!

나의 수업시간에는 돈이 오고간다. by 아인잠

위조 화폐. 뒷면은 백지. 컬러 프린터로 인쇄한 실제 돈의 3분의 2 정도 크기. 아이들은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다가 실제로 한 달 뒤쯤, 돈을 모은 만큼 제대로 화폐가치를 하게 되는 종이돈을 보면서 돈을 모으기 위해 영혼을 불태운다.


내 수업시간에는 쓰자고 하면 종이에 연필 부딪히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 불꽃이 튄다. 다 돈 덕분이다. 아이들도 돈을 좋아한다. 아니, 아이들이 돈을 더 좋아한다.

갖고 싶은 것은 무지 많은데 엄마가 사주니 마니, 원하는 만큼 사줄 턱이 없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만원을 모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2만 원을 모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다 생각하고 있고, 심지어 5만 원을 모아 레고를 사기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아가는 학생도 있다. 이쁘다, 돈이 먹히는 상태가 그나마 순박하다. '돈을 다발로 주셔도 글 안 쓸 거예요'라고 한다면 그게 최악이니.

다행히 아직은 그런 아이는 없었다.


글 한 줄에 100원이다.

글 10줄에 1000원이다.

책 1 한권 읽어면 100원이다. 하루에 5권 읽으면 500원, 일주일에 30권 읽으면 3000원이다.

수업태도에 따라 몇백 원, 발표 성과에 따라 몇백 원, 게임 승부에 따라 몇 백 원, 좋은 질문에 몇 백 원, 내 맘대로 주는 찬스에 아이들은 기꺼이 헌신한다. 아이들은 게임을 즐긴다. 나와 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 반대로 우리의 규율을 어기면 돈 얼마 차감, 토론 시 보이는 자세와 질문, 답변의 성패에 따라서 몇 백 원 차감...

그런 식으로 하면 아이들은 재벌 되고 나는 거덜 날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일주일에 책 10권 읽었다고 써오는 아이들이 흔치 않다. 돈을 걸어도 쉽지 않은 책 읽기. 그나마 그렇게라도 동기부여를 하고, 그룹수업의 재미를 주고, 승부를 걸어볼 수 있도록 하려는 나의 작은 배려는 다행히 아직은 잘 먹히고 있다.


한 달 동안 수고한 우리의 수업결과는 한 달에 1번 정도, 모든 돈으로 물건이나 과자를 구입할 수 있는 잔치가 열리고, 우리는 그때 돈을 주고받으며 경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동안 수업하면서 느꼈던 점들과 서로의 추억, 지나고 보니 알게 된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돈독해지고,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면, 그땐 돈을 떠나서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경지로 나아가고, 그때의 돈의 가치는 '노력'이라는 불꽃을 활활 태우게 하는 원료이자 소소한 재미가 된다.

작은 돈이라도 한 달 동안 조금씩 조금씩 쌓이면 그것도 꽤 값어치 하는 목돈(?)이 된다.

아이들과 과자를 나눠먹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치킨을 뜯어먹으며 우리는 웃는다.

아이들은 돈을 좋아한다. 나도 돈을 좋아한다. 서로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으니 다행이다. 돈이 오가는 아름다운 관계. 돈에 눈을 뜨는 자가 글을 얻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돈까지 따르니 금상첨화. 재미있는 독서논술의 세계. 앞으로 어떤 작가가 나올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오늘도 꼬마작가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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