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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세 가지 성이 있다.

영화 <코르셋>에 대한 단상

by 아인잠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성이 있다. 그것은 남성, 여성, 그리고 아줌마!”


영화 ‘코르셋’에 나온 대사로 당시엔 꽤 파격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처음으로 미디어에 대놓고 표현한 '아줌마'란 단어 아니었을까 싶은데.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때에는 영화를 보지 못하고,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뒤늦게 동영상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인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발끈할 줄 알았던 선배들이 신경도 안 쓰는 것에 한번 더 의아해했다. 선배들은 '말도 안 되는 말에 뭘 신경 써~' 그냥 문학적 표현이야 하고 넘어갔다.

"! 세상이 어떻게 남성, 여성, 아줌마로 존재하니

세상은 나, 너, 우리야."

나는 영화 코르셋 대사보다 선배가 했던 '나, 너, 우리'라는 말이 더 와 닿았다.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면.


당시 방송작가로 일할 때 나의 취미는 영화의 대본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도 인터넷에 검색하면(지금도 그런 모임이나 카페가 있을 것이다) 국내외 영화들의 대사 일부분이나 대본이 올라와있었다.

코르셋 영화를 봤지만 기억은 가물가물해도,

대본이 남아있어 보니,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던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영화 <코르셋> 중에서

- 선주(여)와 상우(남)의 대사

1. 능 앞(밤)
부드럽게 멎는 물차.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
선주 내려서 몇 걸음 걸어 나오며 아, 온통 눈이다.
그리고 예쁜 나무들!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풍경 속에서 비로소 밝아지는 선주

선주 : 너무 아름다워요!
상우 : 근사하죠? 저 안은 더 멋있어요. (물차에 끼워놓은 비닐 부대를 옆에 끼면서) 들어가 볼래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선주의 눈이 경이로움과 호기심으로 들떠 있다. 사람의 입김이 스치지 않은 고요로 가득 찬 능 안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

선주 : 어떻게 이런데 올 생각을 했어요? 여기 자주와요?
상우 : 아뇨. 크리스마스에만 와요.
선주 : 어머, 왜요? 무슨 사연이 있어요?
상우 : 아뇨. 사연 없는데요.
선주 : 사연도 없는데 크리스마스 때면 여길 와요?
상우 : 오면 안돼요?

선주 : (머쓱해지며) 언제 처음 왔었는데요?
상우 : 군대 들어가서 맨 처음 특박 나왔을 때죠, 아마.
선주 : 사연이 있네요
상우 : 사연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선주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난 추억이 많거든요.
(멈춰 서서) 그래서요 같이 추억할 게 없는 사람하고는 못 살 거라고 생각해요. 상우가 이상한 여자네 하는 눈으로 보니까....

선주 : 그냥 그렇다는 얘기예요.
(다시 걸으며) 특박 나왔을 때 어쨌는데요?
상우 : 그때가 크리스마스였는데 뭐 갈 때도 딱히 없고 가고 싶은 데도 딱히 없고 해서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가 여길 들어오게 됐어요.
선주 : 그래서요?
상우 : 시내는 눈도 없었는데, 여기에 오니까 온통 화이트 크리스마스더라고요.

선주 :... 끝이에요?
상우 :.... 왜요? 더 길어야 돼요?
선주 : 아뇨. 혼자서 뭘 했어요?
상우 : 그냥 걸었죠.
선주 : 아무것도 안 하고요?

상우 : 걷다가 뒤를 돌아봤어요 (뒤를 돌아보는 두 사람. 돌아선 두 사람. 온 길을 훑어본다. 두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들.)

상우 : 그때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난 저기서 걸어왔는데 왜 여기에만 있을까?
저 길에 서 있던 내가 나인가, 여기에 있는 내가 나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전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었거든요.

(선주, 그것을 생각해 본다. 상우, 선주를 보더니)

상우 : 난 그때 깨달았죠. 저기에 서 있던 것도 나도 여기에 서 있던 것도 나다. 내가 나였던 어느 한순간이 바로 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주 :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어려워요.
상우 : 좀 쉽게 설명하면요.


상우, 눈으로 벌렁 누워 버린다.
선주,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돌아본다.

상우 : (누워서) 나는 다른 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다. 이제 알겠지요?
선주, 장난스럽게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상우 : 그러면... 지금 이 순간 눈이 내 앞에 있다!
(눈을 뭉쳐서 선주에게 던지면서)



자꾸 무언가를 확인하고 따지고, 이유를 물어보는 선주와 달리, 상우는 초월한 듯 '왜 그래야'하느냐고 묻는 것 같다.

사연이 없어도, 혼자여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이 순간 '나'로 존재하는 것, 나의 존재를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상우는 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그때에도 나, 지금도 나, 그리고 다음에도 나.

마치 철학자처럼 이야기하던 상우가 유일하게 딱 부러지는 표현을 한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규정, '이래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상우는 꼭 그래야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하다. 그것을 영화에서는 상우와 선주의 대사와 시선으로 보여준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상우와 선주가 있다.

이래야 이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보지 않고, 그래야 내가 못나 보이지 않고 멀쩡해 보이는 것이라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한 내가 아니 모습으로,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존재로.점 더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날 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이 말 이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영화가 하려는 말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남자, 여자, 그리고 아줌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나, 너,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삶이 내 앞에 있다.

지금 이 순간 사랑이 내 앞에 있고, 믿음이 내 앞에 있고, 이해와 배려가 내 앞에 있고, 나눔과 웃음이 내 앞에 있다. 내 앞에 희망이 있고 길이 있고 행복이 있다.

비록 사계절 내리지 않는 눈처럼 언제 내릴지, 오긴 할지 모를 기회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는 눈을 기다리는 사람, 눈이 오면 아이처럼 땅 위에 누워버릴 수 있는 나, 차갑고 보드라운 눈 위를 걸으며 자신의 발자국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될 나, 쌓인 눈 위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잘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로소 웃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면 어떨까. 시간이 지나 눈이 녹아서 사라질 지라도 나는 눈에 대한 추억과 느낌과 발자국을 기억하면서 다시 내릴 눈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만남은 기다림을 목적으로 하지않아도 좋다 by 아인잠's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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