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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한 특별한 생일

by 아인잠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크면서) 생각나는 일들 중에 항상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말이 있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했던 말인데, 너무 기가 차고 한이 맺혀서...

"엄마, 너무 예뻐요, 색깔별로 10개만 만들어주세요"

만들어달라는 게 오리기가 되기도 하고 종이 접기가 되기도 하고 어떤 책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그 단골 멘트가 나는 너무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고 닳도록 접고 오리고 칠하고 만들었던 그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은 지금 하라고 하면 도저히 못할 것 같기에.. 마치 목숨 걸고 피 튀기는 전쟁을 끝내고 온 군인이 다시는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랄까.

하트 하나를 오리면, 색깔별로 10개씩은 만들었다. 최소 10개이니, 1시간이면 수백 개가 상자 가득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색깔별로 오리다보면 주문이 더 늘어났기에. 점점 크게 점점 작게 색깔별로 10개씩.

그렇게 오려놓은 것은 아이가 밤을 새우던지 날을 새던지, 뭔가를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발음도 제대로 안되면서 통통한 볼살, 반짝이는 눈, 조그마한 손을 가진 아이가 동그라미 하나 그리면서도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나는 그 모습이 마약 같아서 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해준 것들은 참 작은 인내였고, 작은 정성이었고 최소한의 면피였는데 아이들이 자랄수록 나에게 다가오는 사랑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느 날엔 내가 화장실에 앉아있는데 둘째 아이가 지나가면서 "우리 엄마 똥냄새는 참 향기롭네~"라고 했다.

문을 열어둔 이유는 당시 아가였던 셋째 아이가 화장실 문을 닫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굴욕적인 볼일을 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화장실에 앉아서 문을 닫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첫째는 피아노 학원에 나간 상황이었고, 둘째 아이만이 화장실과 셋째 사이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울어도 너무 우니까, 울음을 어떻게 그치게 해야 할지를... 단지 엄마의 볼일이 어서 끝나야만 울음도 끝날 상황이었다. (어느 엄마는 화장실에서조차 아이를 품에 안고 볼일을 보던데, 나는 신경이 예민한지 그렇게 하면 성공할 수가 없었다. ㅠㅠ)

그 정신없는 와중에 둘째가 한 말은 잠깐 나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주는 듯했다.

나는 아이가 문을 열어놓고 볼일을 보면 냄새나니까 문 닫으라고 하는데

아이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향기롭다고 하니...

엄마가 부끄러웠다.

'지나가는 말'의 위력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눈과 눈을 마주 보고, 입과 입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도 의미 있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지나가면서 말을 하기도 한다. 꽤 자주. 어쩌면 우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허공을 향해서 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때론 뒤돌아서서 때론 자기 할 말만 하고 듣겠거니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지나가듯 표현한 아이의 말이 나를 정신이 들게 했다.

내가 엄마로서 하는 '지나가며 하는 말'들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들로 가 닿았을까.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애들이 방문을 닫아놓고 무얼 하는지 안 열어주어서 섭섭해지려던 때에 짠 하고 내밀었던 것은, 생일을 맞은 엄마를 위한 카드였다.

아마도 첫 째의 지시 하에 동생들이 마주 앉아서 카드를 만들었을 것이다.

딱 봐도 표 나는 나이 서열에 따른 카드.

세 아이들이 정성껏 만들어준 카드 하나하나가 더 의미 있고 감사하고 특별했던 생일이었지만

그중, 막내가 내민 선물이 나를 웃음 짓게 했다.

그것은 바로...



아끼고 아끼던 리본 반지를 나에게 주다니.. 이렇게 성은이 망극할 때가...


세 명의 여신이 서로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형상은 베풂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서 다시 베푸는 이에게 돌아가는 질서로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이 연속적인 운동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ㅡ 세네카, 《베풂의 즐거움》



지금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베풀고 전했던 마음의 선물이, 사랑이 돌고 돌아서 다시 나에게로 왔다. 나도 아이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흘려보내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사랑... 세상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세네카의 <베풂의 즐거움>이 이렇게 특별하게 와 닿은 날,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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