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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를 먹을때마다 생각나는 아이

by 아인잠

운명은 하나의 순간을 타고 온다.

그땐 몰랐다. 그 운명이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할지.


여름 오후, 나른한 시간에 나는 모처럼 여유롭게 신문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신문을 앞 면부터 끝 면 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훑었다. 그것이 한창 어휘력이 솟구칠 때, 나의 습관이었다.

그날도 어휘력 증강을 위해서 이 세상에 어떤 단어들이 존재하는지 보자 하고 신문을 훑고 있었는데, 어느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아이들 한글교육을 위해 자원봉사 선생님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신문 보던 나는 어떤 마음의 이끌림에 따라서 바로 전화를 걸었고, 그렇게 해서 나의 자원봉사는 시작되었다. 1년간 계속된 자원봉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황금 같은 청춘에 황금 같은 시간을 내어서 수업시간까지 왕복 3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와 한결같은 마음이 필요했다.

자원봉사는 의무감으로만 지속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행히 아이들을 보는 것도 좋았고 보람이 있었다. 임대아파트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복지관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내가 맡은 한글 수업도 아이들이 꽤 많이 모여들었다.

수업을 하는데 어느 순간 수업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2주, 3주 지났을까.

도저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결국엔 말하기 편한 아이 한 명을 골라서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선생님이 모르는 사실이 있을까? 선생님 느낌에는 왠지 너희들이 대답할 때 뭔가 눈치를 보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자 아이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사실은 00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여기서 수업하시려면 00의 마음을 얻으셔야 해요, 00가 아이들을 다 조종하고 수업 분위기를 만들어요.그래서 다들 그 아이한테 잘 보이려고 해요."


'엥? 이건 또 웬 거북이 풀 뜯어먹는 소리지?'

나는 의아했다. 지가 뭔데 애들 수업 분위기를 조종하고 말을 하라 마라 하는 것인지, 요 맹랑한 녀석을 보았나!

무슨 일인지 복지관에 계신 선생님들께도 여쭤봤으나 다른 선생님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선생님들께서는 오래 계셨다던가 해서 익숙해진 것 같고, 나는 새로운 선생님이니, 아이 딴에는 나를 간 보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일종의 테스트인 거겠지. 내가 오래 남을 사람인가 아닌가.

어쩌면, 자원봉사자는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이어서, 의무감 없이 힘들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게 마음을 주지 않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도 시간을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도 내가 합격점을 받아야 어차피 내가 그들 앞에 선생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니.

아이의 마음을 얻으려 잘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그 아이를 조금 더 관찰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면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듣고, 코멘트를 정확하게 해 줬다. 어떤 점을 표현한 부분이 우수했고, 어떤 부분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사실을 짚었다. 싸움을 걸어오면 같이 싸워줘야 한다. 비굴하게 들어가거나 힘으로 다스리려 해도 안된다. 싸움은 동등한 입장에서 공정하게 치러야 한다.

수업 준비를 확실하게 했고, 그 녀석이 말을 하면 객관적이되 물렁하게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칭찬을 많이 해주고 격려를 해줬다. 결국엔 인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면, 그런 경우 훨씬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한 달쯤 지났을까. 수업 분위기가 활기차게 되고 아이들 모두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발표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고 내 곁을 맴돌았다. 같이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우린 그때부터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아이는 싸우는 부모님 밑에서, 무서운 아버지 아래서, 폭력을 당하고 걸핏하면 내 쫓기고, 어른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원망과 미움이 모든 어른에 대한 불신으로 작용하고 세상을 전투 자세로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아이는 강해져야 했을 것이고, 아이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힘을 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위해 다른 도시로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자원봉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차마 다음 시간이 이제 나와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인사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그렁거릴 것 같고 아이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눈에 밟혔다. 그런데 다음 시간, 나만 아는 우리들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을 때, 수업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직접 해왔다면서 떡볶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만 먹으라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반찬통을 열자 정말 맛있게 생긴 떡볶이가 1인분 정도 담겨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나만 쳐다보고 군침을 흘리는 상황에서 차마 나는 그것을 나만 홀라당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씩 잘라서 한입씩 다 나눠먹였다. 물론 처음 떡 한 개는 나 혼자 다 먹었다. 너무 맛있고 말랑거리고 매콤하면서도 달달했던 맛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눠주자 그 아이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나만 먹을 수가 없어서, 선생님은 함께 맛있게 먹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나 혼자 다 먹고, 정말 맛있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더 미안한 것은 그 날이 마지막 수업이었다는 것을 모든 아이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쯤 아이들은 30대의 청년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그 갑자기 사라져 버린 선생님을 원망스럽게 기억할지, 고맙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나는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으로 그들이 그들의 성장을 이루어갈 때 잠시 스쳐갔던 사람으로 족하다. 부디 행복하게 꿈을 이루어가면서 자신의 현실에 굴복하거나 부당한 일에 타협하지 않기를. 소신대로 신념대로 살아가면서 소소한 행복을 매일 이루어가기를. 싸움이 넘쳐났던 조그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지켜냈던 것은 그래도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주먹만 한 꿈이었으니, 세월이 지난 지금은 더 단단하고 옹골진 꿈의 아이들로 자라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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