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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May 30. 2020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법원에서 판결문이 나왔다. 모든 이혼을 앞둔 부부가 받길 원하는 판결문을 나도 생애 처음으로 받아보았다.


이혼 판결문이 이렇게 시작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간결명료하다. 법의 표현 방식.


육하원칙에 따라 표현하는 것이 익숙한 내가 이렇게 사실관계가 명확한,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보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이 한 줄로도 이렇게 '감동'과 '회환'과 표현하기 힘든 복잡다단한 생각들을 떠오르게 할 수도 있다니!

이 문장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말은 대학 졸업장을 받았을 때보다 더 떨린다. 떨림은 불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도감과 설렘과 다짐에서 오는 느낌이다.


이 말은 '저희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하는 말보다 더 큰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 말은 입사지원서를 내고 합격서를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뻤고, 사표를 내고 나올 때보다 더 두근거리게 했다.


이 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보고 나올 때보다 더 마음에 남는 것이었고, 세드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봤을 때보다 더 마음을 쑤셔놓았다.


이 말은 어쩌면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할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나는 보았고, 이 말은 누구나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는 말일 테지만, 나는 들었다.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이제 2주 뒤, 이혼신고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때 가서야 나는 내가 이혼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적정리를 할 때, 건강보험을 따로 옮길 때에야 비로소 확실해질 것이다.


이혼을 앞두고

나는...


죄송합니다. 저의 결혼식에 와주셨던 분들께...

축의금은 사는 동안 잘 사용하였습니다.

살면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웃음보다 눈물을 더 많이 보여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거예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결혼할 때도 참 예쁘더니, 이혼할 때에도 이쁘고

이혼하고도 더 이쁘게 살아가는 모습 보여드릴게요.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올해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내 인생을 건,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 더 큰 용기로 살아가야 할 나에게 주는 허가서 같다.

'너 그렇게 살아가도 돼!'하고 법이 내 삶에 허락해주는 허가서.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이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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