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인잠 May 28. 2020

꽃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꽃들에게 희망을> 보며...

이혼 신청을 시작할 때에 변호사님이 말했다.

"이혼은 제게 맡기시고, 작가님은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가세요"     


돈을 빌리면서 빨리 갚겠다고 하자 지인이 말했다.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독자님들이 말했다.

"이제 훌훌 털어버리시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세요"     


모두들 나에게 내 할 일을 하라고 한다. 바꿔 표현하면 '네 일이나 제대로 잘 해라'로 들렸다.

밥을 빨리 하려고 하면 괜히 곤죽되고 죽밥되고 뜸이 제대로 들지 않아서 맛이 없게 되곤 한다.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맛있을 밥을 괜히 서두르다 쌀만 망치는 꼴이 된다. 내가 잘 하던 일인데 새삼 초보같이 밥을 지어놓고 힘이 빠진다. 아, 괜히 했다싶은 마음... 다시 하기는 시간이 없고, 남은 밥은 다 먹어야하고... 먹으면서도 후회가 생기거나 다 먹기까지 잊혀지지 않는 생각. 그런 상황처럼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마음이 먼저 앞서서 발이 동동 굴러질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운동장 조례시간에 전교생이 한꺼번에 걸어나와도 멀리서 보면 나만 눈에 띈다고 했다.

내 걸음이 가장 느리기 때문이다.  

전 교생이 밥을 먹어도, 5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칠때까지 먹는 학생도 나 였다.

내 행동은 느리고 굼떠서 친정엄마는 '그래서 밥이나 제대로 해먹고 살겠냐’고 하신 적도 있다.

그런 내가 부지런해지고 민첩해지고 빨라지고 바빠진 것은 인생에 있어서 두 번의 트레이닝 과정이 있었다.

첫 번째는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두 번째는 결혼생활을 통해.

두 번의 경험 모두 극강의 인생체험이었다.

나의 습관과 기질까지 바꾸면서 나를 탈바꿈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변할 것 같지 않던 내가 변하고,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이 바뀌면서 나도 예전의 나와는 차이가 있다.

남에게 싫다는 소리 잘 못하던 내가 내키지 않으면 ‘싫다’고 표현하게 된 것,

웬만한 일들은 내가 감당하고 말자고 생각했던 내가 ‘해야할 일이나 제대로 하자’고 바뀌게 된 것,

부탁을 못하던 내가 힘들면 부탁하게 된 것,

거절을 잘 못하던 내가 거절도 하게 된 것 등이다.

불평, 부정, 거절, 거부 이런 단어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하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어느새 외부 환경으로부터  ‘no’라고 말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씩 바뀌어왔고, 바뀌어가고 있다.


언젠가 어떤 글을 읽었다. 출처나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이런 내용이었다.

엄마가 아이를 빤히 바라보니, 아이가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가 왜 빤히 보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말하길 ‘엄마가 빤히 바라보니’ 보는 것이라 했다.

나도 오늘 막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막내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도 막내를 계속 빤히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막내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나를 보면 그렇게 사랑이 가득해져?”

그래서 웃었다. “응, 엄마는 너를 보면 사랑이 가득해져.그래서 계속 보는거야,점점 사랑이 가득해지려고”

그랬더니 막내가 말했다.

“그럼 하루종일 계속 봐야겠네, 그럼 나 유치원가면 어쩌지?”

그래서 나는 얼굴 대신 사진을 보겠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때라도 아이의 말과 웃음은 내 삶에 용기를 불어넣고 힘든 내 곁을 지켜주고, 밝은 빛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힘들때면 아이들을 보면 된다.

이른 아침에 새소리가 아닌 차소리에 눈을 뜨고

오후의 햇살보다 구름낀 하늘 아래 미세먼지 속을 거닐어도

내 삶의 원천은 아이들의 맑은 빛에서 나오는 힘에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걷고 웃고 일하는 모든 순간이 나의 힘이 아닌 세 아이들로부터 나오는 생기로 이루어진다.


이혼하면서 친권 양육권은 엄마인 내가 갖는다.

그러나 이혼을 앞두고 있는, 그렇지않은 몇 명 독자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래도 작가님은 아이들과 함께 계시니 참 행복하시겠어요.”

맞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지켜나가고 싶다.

저녁에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신기하게도 자꾸 나를 따라다닌다. 고등학교, 대학교, 방송국에서, 아이낳고, 아이들 수업하며.. 최소한 1-2년에 한번씩은 계속 읽게 된다. 이 책만큼 많이 읽은 책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책을 보는 내내 지겹도록 ‘애벌레’ 이야기만 보는데 어째서 제목은 ‘애벌레에게 희망을’이 아니라 ‘꽃들에게 희망을’일까.

생고생을 해서 고치에 갇혔다가 날개달고 나비되어 날게 된 것은 애벌레인데, 애벌레의 모습이 다른 애벌레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인 줄 알았더니, 가만보니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을’이었다. 애벌레의 탈피와 비상은 꽃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 제목지어진 것이 아닐까.

내가 꽃이고 아이들이 어린 애벌레인줄 알았더니, 가만보니 우리집에서 내가 ‘애벌레’이고 내 아이들이 꽃들이었다.

나는 ‘아인잠’이라는 고독속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면서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

모두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정상을 향해 다른 애벌레를 밟고 올라갈 때, 나는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고치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시기를 벗어나 이제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삶.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이혼 후의 모습이다.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 기어오르지 않고 날아가며 바라보는 세상, 때론 힘들지라도 그것을 견딜 힘이 예전보다 갖춰졌다.

바쁘고 힘들 때, <꽃들에게 희망을> 펼쳐보면서 나의 날개를 다시금 확인해보게 된다.

세 아이들이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https://brunch.co.kr/@uprayer/452


작가의 이전글 따뜻한 수제비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