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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줄게

by 아인잠

글이 안 써진다고 하자 일곱 살 막내가 다가와서 말했다.

‘엄마 글이 안 써져? 그러면 글 속으로 들어가 봐. 완전히 들어가야지.’

깜짝 놀랐고 뜨끔했다. 글 속으로 들어가 보라니! 어쩌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글과 더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싶다.

‘그래, 글 속으로 들어가야지’ 하며 글을 쓰고 있는데, 막내가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 말했다.


“여기엔 글자 나무가 있네, 열매가 주렁주렁하네, 엄마 주변에는 표현하는 열매, 글 쓰는 나무가 튼튼하게 있고, 언니 주변에는 그림 열매가 맺혀있고, 오빠 주변에는 레고 하는 나무가 있고, 나는 이곳을 모두 다니면서 물을 주고 있네.”


이쯤에서 나는 글을 쓰던 손을 멈추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의 해맑음과 사랑스러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매 순간 표현하고 확인하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엄마는 바쁘고, 언니 오빠는 각자 할 일을 하고 노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막내가 말이 많아졌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부쩍 말이 많아지고 상냥스러운 태도로 입장을 바꾼 아이의 태도와 적응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각자 할 일을 해나가고 독립적인 행동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어떤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일에 소소하게 책임을 지는 상황을 겪는 것이다.


며칠 전 초등 3학년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지를 받아왔다.

아이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지 학교 다녀오면서 '엄마, 오늘 시험을 쳤는데 내가 4문제를'까지 말하며 웃으며 들어왔다. 4문제를 틀렸다는 건지, 맞췄다는 건지 기대가 되는 찰나, 아이가 시험지를 내밀었다. 정확하게 4문제에 동그라미가 쳐져있고, 나머지 숫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주 시원시원한 물줄기가 주룩주룩, 코로나로 늘어지게 쉬고 놀았던 결과, 20문제에서 4문제를 맞았다. 4문제나 맞춰서 잘했다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BGM.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그 사람은 모를 거야 모르실 거야~~’

(feat. 비 내리는 영동교)



중 1 누나와 44살 나는 시험지를 붙들고 웃었다.(울었다)

이 와중에 4문제는 맞춰서 고마웠다.

그런데 어느 한 문제에 눈길이 갔다. 내가 봐도 모르겠는 것이었다. 3학년 문제를 44살인 엄마가 모르다니.

그래서 설마 중 1 누나는 알겠지 싶어서 보라고 했더니, 중 1 누나도 모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합의를 했다. 이건 문제가 잘 못된 것이거나, 너무 어려운 문제라고.

우리는 만약 공부를 한다면 다음엔 알 수 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잘 된 것은(?) 아이가 틀린 문제에 대해 ‘이것도 모르나?’하는 생각을 아무도 할 수 없었다. 우린 다 같이 모르는 가족이었다. '아하하하...' 진땀이 나는 것을 웃고 말았다.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나는 공교육의 힘과 시간의 힘과, 아이를 믿기로 했다.

나는 엄마의 자격을 둘러싼 허물로부터 슬그머니 뱀처럼 빠져나와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은 참 따뜻했다. 아이가 틀린 16문제는 정말 문제가 있다. 그걸 맞추는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았겠다. 그래, 인생 뭐 있어? 잘 먹고 잘살자. 잘 놀고 잘 웃자. 그러다 문득 공부를 해야겠다거나 답이 뭘까, 문제는 어떻게 푸는 걸까 한 번은 궁금해지지 않을까, 누구라도 한 명쯤은 공부해서 비 내리는 날씨에 해가 방방 떠있도록 해주지 않을까, 아님 말고, 우산을 튼튼히 몇 개 더 준비해두면 된다.


내가 글이 안 써지는 문제나, ('글 속으로 들어가야지~')

딸아이가 그림이 맘에 들게 안 그려질 때나,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지~')

둘째가 수학이 영 관심이 없는 상황이나... ('수학 속으로 들어가야지~')

막내가 놀 사람이 마땅찮을 때, 우린 각자의 시련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놀이 속으로 들어가야지~')


지구 상에는 축구선수, 미용사, 과학자, 요리사, 사진작가, 철학자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믿고 싶다. 세상에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 마음이 차가운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 마음이 굳은 사람이 골고루 필요하다. 얼마만큼의 공기를 폐 속에 넣어야 결핵균이 죽는지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장미를 한 음절의 멜로디로 포착해서 병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마음이 기쁨으로 넘쳐 오르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는 장면을 스무 장의 원고에 담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 박노성, <브랜드 미> 중에서


나는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나와 내 아이들이 어떤 '역할'을 하며 살게 될지가 몹시 궁금하고,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도 궁금하다. 그 직업을 갖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어떤 경험이 필요한지, 그래서 얼마나 공부해야 하고 무슨 실패가 필요하고, 어떤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시험지 점수로만은 판단할 수가 없고, 그 외에 잘 놀고, 잘 웃고, 실수와 실패, 고민과 시간이 필요한 것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공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단지 비 내리는 시험지에 5초간 눈길이 머물 뿐...

그 결과를 당장은 책임지지 않지만 '어차피' 내 아이가 짊어지고 책임져야 할 사건이기에, 지금 놀고 있는 시간은 나중에 복리로 불어나 아이가 공부로 채워야 할 때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한다. 다만 공부의 방식이 다를 뿐, 순서나 방법은 다르지만, 아이는 아이의 방법대로 공부를 해나가게 될 것이다.


사람의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데 동의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우리의 환경이,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지금의 시간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환경이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피에르는 세금 관련 업무로 돈을 버는, 당시 중상류층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집에는 항상 서류와 필기도구들이 넘쳐흘렀다. 종이와 펜, 이 두 가지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15세기 말 전 세계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만약 피에르가 가난했거나, 종이나 펜과 무관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 유민호, <행장> 중에서.


나로 인해 아이들은 어떤 사람이 될까.


내가 수학을 해봐서 아는데, '잘 모르겠다.'

조금 해봐서 아는데, '많이 모르겠다.'

많이 안 해봐서 아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수학적 사고력과, 수학적 상상력과 응용력, 수학의 인내력과 확실성을 아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하긴 하다는 것이다.

어설프고 얕은 지식이지만, '때'가 되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서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고 3 때 수학 문제집 하나만 골라서 종이가 너덜너덜할 때까지 익혔다. 그랬더니 중학 3년, 고등 3년의 기본기 정도는 알아졌고, 6년 공부한 아이들의 평균 이상은 나도 알게 되었다. 1년만 공부해도 그 정도인데, 적어도 한 3년 바짝 하면 적어도 나보다는 잘 알지 않을까? 하는 게 솔직한 나의 '믿는 구석'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기 전까지는 억지로 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거기에 쏟을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써야겠다. 나부터 좀 살아야겠다.

비행기에서 위급 시에는 엄마부터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 심정이다.


교육이란 알지 못하는 바를 알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은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 마크 트웨인

풍선껌은 모두 잘 부는 우리 가족 by 아인잠's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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