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인잠 Jun 17. 2020

글쓰기를 망설이는 핑계를 이기자

<지구 어디쯤, 처음 만난 식탁>을 읽고 4.

<지구 어디쯤, 처음 만난 식탁>에는 지구촌 어딘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건 누군가의 후회이다.

'나는 이 말을 하고는 이내 후회했다. 눈길을 모래사장으로 돌려 내가 한 말을 제발 바람이 흔적도 없이 지워 주기를 바랐다.'


그건 누군가의 깨달음이다.

'망각은 세월이 노인에게 주는 선물인 듯싶다. 아픈 기억의 파편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좋은 기억들이 그 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도 신의 축복이 아닐까. 주름 가득한 얼굴에 어린아이의 얼굴을 드리울 수 있으니까.'


그건 누군가의 슬픔이다.

'세이타 할머니의 아버지인 페드로는 지주의 눈밖에 나서 감옥에 갔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투항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페드로는 탈옥해서 집 앞까지 왔다가 마을 양치기가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누군가의 절박함이다.

'때로는 생존이 자존감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이사벨의 어깨 위에 얹힌 짐은 그녀가 혼자 지기엔 너무도 버거웠다. 그녀에게 자존감은 사치에 불과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어떤 이의 감정이, 회한과 외로움과 가난이, 눈물과 추억과 괴로움이, 기쁨과 행복과 승리가 담겨있다. 그래서 책을 통해 만나지는 사람과 그들의 감정은 내게도 들어와 나의 감정을 일깨우고 글을 쓰게 하는 영감을 불러온다.

그래서 글을 쓰고자 하는 분들에게 독서를 권하게 되는 이유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감정의 여러 얼굴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항상 반복되는 패턴과 마주치는 얼굴, 비슷한 일상과 무료한 대화에서 영감을 얻기란 우물가에서 다양한 음료수를 맛보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독서를 하기 어려운 이유만큼, 글쓰기를 망설이는 핑계도 많다.



<지구 어디쯤, 처음 만난 식탁>에서.

캄보디아 원주민이 해외 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어떻게 자립할 수 있을까 연구하던 끝에 위츠쉰은 그들의 삶을 보며 알게 된다.

사람들이 스스로 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전에는 아무리 다그치고 가르쳐도 헛수고라는 것을.

그러나 분명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기적의 힘이 조금 필요한 일일 수도.

"생선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낚싯대 사용법부터 미끼 끼우는 법, 잡는 기술, 물속의 생태, 판매, 유통 등에 이르기까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 한 번 듣고 이해하지 못하면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해서 설명해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츠신은 결단했다. 그리고 버섯재배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돕고 나아가 정신적 자립까지 이루어지도록 해나가기로, 그리고 해냈다!

희망이 없던 사람들의 자립을 도우며 위츠신은 소리 높여 말했다.

"실패할까 봐 두렵다고요? 아직 시도도 안 하고 어떻게 알아요? 경험이 없어서요? 경험이 없으니 배우는 거죠."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변하게 만들어야 하고, 하게 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해야 하고, 아무리 다그치고 가르쳐도 쓰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실패할까 봐, 잘 쓰지 못할까 봐, 제대로 못할까 봐 두려워서 시작도 하지 않으면, 시도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경험이 없어서 못쓰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경험이 없으니 써보는 것이고, 써보는 경험이 '경험'이 된다. 쓸수록 경험하게 되는 글쓰기, 쓰기의 경험이 쌓여갈수록 글에 대해 알아진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글 쓰는 이에게 가장 좋은 일이다.




위츠신이 그토록 원주민의 자립을 돕고자 했던 것은 진정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돈, 옷, 신발, 식량을 보내주면 현지의 산업은 빠르게 몰락하고 불경기에 빠져 생계가 더 어려워진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 그들은 습관처럼 타인에게 의지하고 말 터이다."


처음에 '버섯'을 키워 자립을 돕고자 했던 위츠신은 희망 없는 원주민들을 보면서 점차 꿈을 키워간다.

'버섯'이 아니라, '버섯농가'를 키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런저런 실패와 경험 끝에 그는 성공한다.

"그렇게 고생한 결과, 가장 먼저 얻은 성과는 버섯이 아니라 참가자들의 믿음이었다. 참가자들이 믿고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고 따라와야 일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다. 물론 성공은 쉽게 오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실패와 실망을 거치고 나서야 버섯이 한 잎 한 잎 나오기 시작했다.(중략)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중략) 어두운 버섯 재배실에서 한 잎 한 잎 자라는 건 버섯만이 아니었다. 어둡기만 하던 미래에 희망도 함께 자랐다. 가난의 터널을 벗어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버섯을 통해 희망이 자라듯, 글을 통해 희망이 자라고,

가난의 터널을 벗어나게 될 수도 있다. 눈물과 고통과 외로움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다.

힘듦과 애씀과 절망과 후회의 터널을 통과하는 글쓰기.

책을 통해서 만나는 좋은 문장들을 직접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는 시작된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면 작은 행복이 큰 기쁨이 돼'

'단순한 삶 속에서 만족을 느낄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은 받는 것보다 주는 법을 더 잘 안다.'

'삶이 비록 넉넉하지 않을지라도 자투리 재료로 만든 근사한 식사로 즐거운 추억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가정에서 보내는 평범한 나날과 같은 무형적인 자산 가치는 GDP로 절대 나타낼 수 없다.'

'돈이 없는 게 가난이 아니에요. 창의와 실천을 잃은 삶이 진짜 가난이죠.'



내가 할 수 없었던 이야기, 머리로는 알아지는 이야기를 나 아닌 어느 작가가 표현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내가 적어보는 것이다. 그대로 따라서. 따라 적은 다음에 딱 한 문장만 더 적어보자. 이런 식으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면 작은 행복이 큰 기쁨이 돼'

- 작은 행복이 큰 기쁨이 된다면, 나는 더 많은 큰 기쁨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  


'단순한 삶 속에서 만족을 느낄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은 받는 것보다 주는 법을 더 잘 안다.'

- 받는 것보다 주는 법을 더 잘 아는 현명함이 내게는 있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삶이 비록 넉넉하지 않을지라도 자투리 재료로 만든 근사한 식사로 즐거운 추억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냉장고 속 자투리 당근으로 근사한 볶음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행복, 즐거운 추억이 선사하는 행복의 레시피를 하나씩 찾아보자.


'가정에서 보내는 평범한 나날과 같은 무형적인 자산 가치는 GDP로 절대 나타낼 수 없다.'

- 내가 보내는 평범의 자산가치는 GDP로 나타낼 수 없다. 나의 평범한 오늘에 감사하자. 누군가가 그토록 간절히 바랬을 오늘...


'돈이 없는 게 가난이 아니에요. 창의와 실천을 잃은 삶이 진짜 가난이죠.'

-  진짜 가난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짜 행복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돈 없는 가난을 착각하지 않도록, 진짜 행복한 삶을 살아가자. 창의와 실천을 잃으면 삶이 진짜 가난해진다.



무슨 말이건 한 문장이라도 시작하면 글이 될 수 있다. 첫 시작이 어려울 뿐, 단 한 번의 경험이 쌓이면

한 문장이 두 문장이 되고, 여러 문장이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이면 글이 된다.

진짜 가난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나의 생각이 가난해지지 않도록

마음의 가난에 함몰되지 않도록

글을 쓰고

글을 말하고

글을 채워가는 삶이 되면 좋겠다, 글쓰기를 통해서.



https://brunch.co.kr/@uprayer/481


https://brunch.co.kr/@uprayer/45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