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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May 03. 2023

버킷리스트 말고 행복리스트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 김다현



파이어족과 관련된 책이 5권째를 넘어선 순간이었나? 내 눈에 책 속 파이어족들의 공통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파이어족을 결심하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행복리스트를 써봤다고 한다. 행복리스트? 죽기 전 꼭 하고 싶은 일을 말하는 버킷리스트와는 다른, 평소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들을 말하는 행복리스트. 그들은 빈 종이에 행복한 순간들을 적어보고, 그 시간을 통해 본인에게 뭐가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 어디 한번 나도 한 번 해볼까?




막상 행복리스트를 쓰려고 하니 10개라는 숫자가 크게 느껴진다. 우선 1번의 번호를 쓰고 첫 줄을 써내려 가는데 한참이 걸렸다. 내가 행복한 순간들이 언제였더라?



남편과 아들과 산책했던 순간,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가서 날 바라보며 활짝 웃는 얼굴을 마주하던 순간,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가족들과 수다를 떠는 순간, 주말에 들린 공원에서 그늘을 찾아 돗자리를 펼쳐 눕는 순간. 행복의 순간들을 써 내려가다 보니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10개의 행복리스트는 금세 다 찼다. 심지어 10개로 내 행복을 추리기는 너무 부족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인생은 다채로웠다.



가만히 내가 쓴 행복리스트를 읽어보니, 평소의 내 나름 야망들이나 오랜 기간 꿨던 목표를 이뤘던 순간들은 리스트에서 찾을 수 없었다. 행복의 자리자리마다 일상의 순간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리스트들과 책 속의 행복리스트를 겹쳐보니 행복했던 순간들이 꽤나 겹쳤다.





어머! 나 준비된 파이어족이었나 봐!








은퇴 후에는 꼭 필요한 일에만 돈을 아껴 써야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들을 억눌러가면서 오랫동안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욕구를 참는 것 대신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소비 습관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은퇴 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를 미리 연습하기 시작했다. 피부 관리 습관과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 외에도 집에서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고,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면서 돈을 줄이는 연습을 했다. 하고 싶다는 욕구를 돈으로 채워서 해결하기보다는 나의 시간을 들여서 채워갔다. 다행히 돈을 줄이고 시간을 들여서 하는 일,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며 하는 일들은 힘들기보다는 즐겁다!_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 김다현



행복한 순간들이 그들과 비슷하다해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난 그들과 겹친 나의 행복리스트가 꽤나 마음에 들었고 파이어족들의 삶에 매료되고 있었다.



행복리스트를 쓰고 나니 직장에 미련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직장생활과 월급쟁이 생활이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퇴사를 하고 싶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이 마음은 분명 퇴사를 해야겠다와는 다른 마음이다. 직장을 다니며 천천히 파이어족을 준비하자는 것, 65세까지의 정년을 정해두지 말고 준비가 된다면 조금 더 이르게 은퇴해야지라는 것.



그렇게 나는 내가 원하는 때의 마음 편한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을 향한 길에 첫걸음을 하기로 했다.







파이어족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쓰는 돈을 관리하는 일이다.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버는 만큼 많이 쓰는 게 아니라 진짜 필요한 데에만 지출을 하며 소비를 줄이는 것.



지금의 나는 어떻게 돈을 쓰고 있는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 집의 가계상황을 확인해보기고 했다. 평소 가계부를 쓰는 행위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라 가계부는 잘 쓰지 않는 나는 일단 한 달~ 두 달 정도의 카드값 내역을 확인했다. 그리고,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과 변동적인 지출들을 정리해 보았다.



주택담보대출금의 원리금 상환금액,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통신비, 자동차 유지비가 고정적으로 나가고 있고, 식비나 생활비 같은 변동비용은 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이런 모든 금액을 더해보니 3인가족인 우리는 고정금액 140만 원, 변동금액 150만 원 정도의 돈을 한 달 동안 쓰는 중이었고, 특히 변동금액에서는 식비와 여행경비의 비율이 높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대단히 정교하진 않지만 나름대로의 정리가 된 가계를 보니 소비를 줄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몇 날 며칠을 남편과 함께 고민하던 내가 내린 결론은 외식을 줄이는 것! 우선적으로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식비를 관리하는 것이다. 집밥을 많이 해 먹고, 외식과 배달음식을 줄이는 것.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직접 음식을 해먹어보는 재미를 만들어보자!



그렇게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괜히 집 앞에서 파는 쑥을 사서 쑥전을 해먹기도 하고, 찌개를 끓여보기도 하고, 집에 남아있던 당면으로 잡채도 해 먹어 보기도 하며. 물론 매일같이 요리를 해서 먹은 건 아니다. 어떤 날은 밀키트를 사서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운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치킨이 땡겨 배달을 시켜 먹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은 우리가 느낀 건 이 과정이 우리 가족에게 스트레스는 아니라는 것.



'이런 요리를 내가 한다고?' 하며 뿌듯해하는 날들은 쌓여만 갔고, 괜스레 유튜브로 음식 만드는 영상을 보며 연습하는 날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돈을 줄이고 시간을 들여서 하는 일을 우리가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다 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껏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수없는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쳐 적어도 한 가지쯤은 잘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 아쉬움은 하나둘 새로운 경험으로 즐겁게 덧씌워질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은 그 과정만으로도 은퇴 후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테니까._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 김다현



파이어족을 꿈꾼 지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중에는 파이어족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내가 안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꼭 파이어족이 되지 않더라도, 지금의 시도는 결국 뭔가를 남기지 않을까? 


오늘의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이 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우리 부부는 가계를 관리하기 시작했고 건강한 한 끼 식사를 스스로 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이 자체로도 이미 충분하다.



(나 지금.. 시작도 전에 겁먹은 것 같아...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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