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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씽큐베이션 12기

쓸데 없는 생각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자아란 무엇인가, 즉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는 좋은 놀이터와 같았다. 이 책을 읽고 그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다. 정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유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근접한 답을 찾았다는 기분이 든다. 덕분에 나는 다음 쓸데없는 생각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아무쪼록, 이번 서평은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준, 나의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민했던 그 질문에 답을 해준 파트를 중심으로 작성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아라는 개념은 허상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다운 것을 추구한다. 이는 '자아'라는 고정되어 있는 객체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책에서는 자아라는 고정된 객체는 없다고 말한다. 육체적으로도 없으며, 정신적으로 없다.


엄연히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이 떡하니 있는데 물리적인 객체가 없다니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몸에 있는 세포의 수보다, 몸안에 살고 있는 미생물의 숫자가 더 많다. 그리고 그 미생물, 특히 장내에 있는 미생물은 우리의 신체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장내유익균이 부족하면 각종 자가면역질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자가면역질환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누군가에게는 류마티스 관절염이 올 것이고, 누군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다. 정신적으로 장내유익균이 부족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처럼 인간은 몸속에 있는 미생물에게 생각보다 많은 부분 지배당하고 있다. 그럼 이 몸뚱아리는 누구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미생물의 것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 보다 내가 내 몸을 더 잘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틀린말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세포는 어떨까? 세포는 우리 몸의 가장 기본되는 단위라고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세포는 우리 몸이다. 그런데 모든 세포는 수명이 짧다. 세포가 죽은 뒤 새로운 세포가 탄생하여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인간이 1번 사는 동안 몸속에 있는 세포들은 몇번이고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그래도 우리 몸은 그대로 있지 않는가 라는 반문이 들 것이다. 그럼 사물에 빗대어 이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정말 아끼는 소중한 볼펜이 있다고 치자. 그 볼펜이 너무 소중한데 고장이 났다. 그래서 스프링을 교체했다. 그러다가 한 달 뒤에는 잉크가 다 되어 새로운 잉크로 갈았다. 그러다 어느날 그 볼펜을 실수로 밟아버렸다. 그래서 본체가 깨졌다. 다행히 같은 본체를 구할 수 있어서 본체를 교체했다. 이렇게 볼펜 부품의 거의 대부분을 교체했는데도 여전히 그 볼펜은 같은 볼펜인가? 처음에 받았던 그 소중한 볼펜인가? 같은 볼펜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 몸도 세포가 다 바뀌었는데 같은 몸이라고 하기가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정신적인 자아는 어떨까? 우리 정신이야 말로 더 다이나믹하게 변한다. 육체적 자아보다 빠르게 변하며 쉽게 변한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서 변하고, 내가 읽은 책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우연히 본 게시글에 의해 내 정신적 자아가 변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보다가 자아가 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말그대로 실시간으로 자아가 계속 변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정신적 자아는 고정된 어느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어느 방향으로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고 표현하고 싶다.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돌의 위치에 따라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둑이 있으면 잠시 고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둑을 넘고 다시 가파른 계곡을 빠르게 내려간다. 그러다가 흙에 흡수되어 나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증발하여 빗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다움을 쫓는 것이 힘든 것 같다. 나는 계속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이유는 우릭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컴퓨터도, 과거에 PC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쯤되면 자아가 변한다는 사실은 알것이다. 그래도 '변하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아니냐? 라는 궁금증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자아는 허상인 것 같다. '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생존에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해왔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이 책에서 언급된다. 지금 사냥을 하고 힘들게 부싯돌을 치며 불을 지피고 있는 '나'와, 1시간 뒤에 그 사냥감을 불에 익혀서 배부르게 먹을 '나'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이 보장이 되어야만 우리는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냥은 생존 본능이라서 동물들도 한다. 하지만 동물들이 책을 읽진 않는다. 근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자아라는 개념이 있는 우리는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아'라는 개념을 뇌가 만들어 내서 우리를 노력하게 만드는 생존 방식이라는 가설에 동의한다.


이렇게 나의 사유는 끝이 났다.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것 같다. 나는 허상이며, 생존을 위해 유리하게 만들어진 선의의 거짓말이다. 뭔가 슬퍼지지 않는가? 실제로 자아 개념이 사라지는 정신 질환이 있다고 한다.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걸어다니는 시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굉장히 무섭다. 실제로 자아가 없어지는 경험은 우울하고 슬픈 것 같다. 자아가 있어 인간은 풍부한 감정도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런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눈감고 속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명상을 하면 자아와 분리되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명상을 하다보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자아에 감사하고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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