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 빨리 끓는다」
고도가 높으면 비행기도 뜨는 데 힘이 더 든다. 해발 1000미터 캘거리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려면 해수면 높이의 공항보다 20% 정도 더 긴 활주거리가 필요하다.
고도가 높아지면 공기밀도가 낮아지고, 그만큼 양력을 얻기 어렵다. 공기밀도가 10%나 낮은 이곳에서 거대한 쇳덩어리가 나는 데 필요한 양력을 얻으려면 더 빠르게 달려야하고 그러자니 활주로를 더 길게 써야 한다.
이 곳 공기는 얇고 가볍기 때문에 캘거리 공항(YYC)은 북미에서 가장 긴 활주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토론토나 밴쿠버 공항보다 1000미터는 더 길다. 미국쪽 로키가 있는 콜로라도의 덴버 공항도 같은 이유로 비슷한 길이의 활주로를 갖고있다.
비행기는 조금 더 달리면 된다. 문제는 사람이다. 앞선 글에서 와이프도 오자마자 천식을 얻었다고 했는데, 사람도 공기밀도가 낮은 곳에 오면 같은 숨을 쉬어도 얻는 산소량이 줄어든다. 예민하다면 공항에 내리자마자 숨이 가쁘고 머리가 멍하거나 쉽게 피로감이나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 고도에서 혈중산소포화도가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 서울이나 캘거리나 공기 중 산소농도의 비율은 약 21%로 동일하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지고 기압이 낮아지면 공기밀도가 자체가 희박해져서 숨을 들이마셔도 폐로 들어오는 산소 분자의 개수가 적어진다. 캘거리에서는 해수면 도시보다 숨 쉴 때마다 약 11~12% 적은 산소를 마시게 된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바로 쓰러질 정도의 차이는 아니다. 하지만 몸에는 분명히 임팩트를 준다. 몸은 부족한 12%의 산소를 보충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호흡수를 늘리거나 심박수를 높여 숨결이 조급해진다. 그래서 쉽게 피로해지고 계단을 오르거나 운동을 할 때 평지보다 숨이 금방 찬다. 부족한 산소때문에 알코올 분해 속도가 느려져 술에 더 빨리 취한다는 속설도 있다.
자신의 머리 나쁘고 성질 더러운 것을 낮은 혈중산소포화도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캘거리에서는 물이 빨리 끓는 것처럼 피도 빨리 끓는다. 낮은 공기밀도는 비행기는 잘 못뜨게 하는 대신 사람들은 쉬이 방방 뜨게 한다. 난폭운전과 로드레이지는 이민자들이 몸에 묻혀 온 제나라의 운전습관 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빨리 끓는 피에 대해서는 수 천년 미리 와 있던 이곳 원주민들도 아직 적응을 못했는지 서로 치고 박느라 앞니가 없는 사람들이 빈번하다. 밭은 호흡이 음주와 빈곤과 중독과 함께 있으면 더 참을성이 없어진다. 백년 전 척박한 서부의 들판을 개척하던 캘거리 카우보이들도 성질을 못참고 총을 뺐을 것이다.
그래도 이민 선배들이 찾은 기술적 해법이 있다. ‘빨리 끓는 피’의 후과를 지난 백년동안 몸으로 체득한 캘거리 사람들은 숨고르기를 위해서 로키로 다시 들어간다. 혈관속에 산소 결핍이 생겨 조급해지거나 참을성이 없어지면 숲으로 들어가 느리고 깊게 호흡하며 며칠 지내다 오면 된다. 그야말로 리트릿이다. 환경을 바꿀 수 없으니 리듬을 바꾸는 ‘관리된 느긋함’이다.
이민한지 15년. 50대 중반을 넘은 나이 탓인지, 낮은 혈중산소포화도 때문인지 가릴 수는 없으나 피는 쉬이 끓고 욕은 더 진득해진다. 로키가 거칠어서인지 삶이 터프해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이네들이 체득해 온, 방방 뜨지 않기 위해 지긋이 눌러낸 느긋함을 배운다.
숨을 고르고 길게 호흡하면 참을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마저도 힘들면 로키 숲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들을 따라 느릿느릿 생활하는 법을 터득하려고 노력한다. 서울에서 하듯 열심히 하려 하면 숨만 더 찬다. 비행기는 활주로를 늘려 해결하고 나는 사는 속도를 줄여 해결한다.
노즈힐에 올라 느리게 걸었다. 멀리 보이는 캘거리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린다. 오늘따라 유난히 오래 달린다. 관제사가 “아직 아니다, 조금 더 달려라”라고 말하고 있는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