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맞는 새해
구랍 12월 31일.
구랍(舊臘)이라. 지금은 신문에서도 잘 쓰지 않을, 이 고색창연한 말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 말기를. 중년을 넘겼거나 노년에 가까울수록, 불과 이틀 전 일을 먼 과거로 보내버리고마는 ‘작년’이라는 말이 청년들보다 훨씬 더 아쉽게 느껴지니까. 구닥다리 용어가 생활에서 훨씬 더 비폭력적이거나 경제적일 때가 있다.
각설하고, 서울보다 16시간 뒤를 사는 이곳에선 올해 마지막 해가 이제 막 솟은 아침이었는데도, 뉴스에서는 벌써 날짜변경선 왼쪽 나라들의 새해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한국, 홍콩, 대만, 중동… 화면은 차례로 지구의 자전속도에 맞추어 새해를 맞는 나라들의 풍경과 카운트다운을 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모습을 비추었다.
한국에 있었을 땐, 다른 나라의 새해맞이 소식은 1월 1일 저녁이나 되어야 들을 수 있었다. 스물네 경도 순서에서 끄트머리 즈음에 있는 이곳에서 섣달그믐날 미리 듣는 새해 소식은 스포일러, 말하자면 약간 김이 새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내가 '아침의 나라'에서 참 멀리도 떨어진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울적해지기도.
서울과 캘거리는 하루 차이로 낮과 밤이 바뀌어 있다. 서울은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9시간이 빠르고 (GMT+9), 캘거리는 7시간이 느리니(GMT-7) 둘의 차이는 16시간이나 된다. 3월부터 11월까지 적용되는 서머타임(일광시간절약제, Daylight saving time)이 그 차이를 한 시간 줄여 놓기는 한다. 하지만 오전 8시에 보신각 타종과 함께 맞는 조국의 ‘새해’와 밤 0시에 연인들의 키스로 여는 ‘New Year’ 사이엔 여전히 깊은 간극이 있다. 나는 늘 내 마음의 표준시가 언제일까를 생각한다.
사실 날짜변경선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와 하루 전 날을 사는 것은, 섭씨-화씨나 미터-야드 변환 정도의 잠깐의 헷갈림 외에는 그닥 불편함이 있진 않다. 하지만 가끔씩, 내 마음의 표준을 두 개로 나누고마는 이 복잡한 시간대가 하나로 합쳐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캐나다와 미국이 동서 사이에 4개의 시간대가 있는 것과 달리, 중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임에도 동서 간에 시차를 두지 않고 전 국토를 동일한 시간대로 묶고 있다. 비행기로 4~5시간이나 되는 서쪽 끝 신강고원지대에서부터 동북쪽 끝 만주까지, 엄밀히는 5개의 시간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의 표준시로 통일하고 있다.
중국이 그런 이유는 서부가 인구도 얼마 안되고 낙후되어 시차를 둘 경제적 필요가 없기도 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이 무너져 분열할 수도 있다는 우려때문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세계가 단 하나의 표준시를 쓴다면 서로 더 가까워 지지는 않을까?
표준시가 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15분 정도 실제 시차에도 일본의 동경표준시를 쓰는 서울이나, 서북쪽으로 한참 치우쳐져 있는 중원표준시를 쓰는 북경을 봐도 과학 아닌 어떤 다른 이유들이 개입하고 있는 듯. 그야말로 정하기 나름.
그렇게 보면 송년이니 새해니 하는 것도 모두 그레고리력이 ‘그렇다고 정한’ 것에 따르는 것일뿐이니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서울에 가면 표준시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통에 몸도 마음도 적응시간이 필요하다. 16시간 차이는 적응에도 16일이 걸린단다. 그래도 다시 날짜 변경선을 건너 전날로 돌아오면, 마치 16시간을 번 느낌이 나기도 한다. 인생에서도 어떤 선을 넘으면 그 전날로 돌아가는, 그런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매번 후회없이 살 수 있을까?
로키의 사계(60'X80'), Oil on canvas,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