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감각이 만들어낸 가짜 현실
어느 날 밤, 골목길을 걷다가
작은 강아지가 쓰러져 있는 듯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가로등 아래,
하얗고 둥그런 무언가가 축 늘어져 있었고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나는 그 강아지의 체온과 숨소리까지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그것은 바람에 찌그러진 비닐봉투였다.
그날 나는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
불완전한 빛과 어둠,
과거의 기억과 걱정이 섞여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잠시 만들어낸 것이다.
그 이후 비슷한 경험을 할 때마다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눈앞의 이 세계는 진짜일까,
아니면 내가 믿고 싶어 하는 환상일까?”
우리는 흔히 눈으로 본 것을 객관적 현실이라 여긴다.
하지만 뇌과학은 말한다.
감각은 수용이 아니라 재구성이라고.
눈은 빛을 받아들이고, 망막은 그것을 전기 신호로 바꿔 뇌로 보낸다.
하지만 뇌는 그 신호를 있는 그대로 읽지 않는다.
“이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덧붙여 그림을 다시 그린다.
그 해석에는 과거의 경험, 기억, 기대,
그리고 감정이 함께 개입한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를 사람으로 착각하거나, 조용한 공간에서 누군가 이름을 부른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본다’고 믿는 세계는 외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낸 내부 시뮬레이션의 결과물이다.
최근 뇌과학에서 주목받는 예측 부호화(predictive coding) 이론은 이 과정을 더 정교하게 설명한다.
이 이론은 베이즈 추론(Bayesian inference)을 기반으로 한다.
뇌는 감각 정보를 빈 종이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가설을 먼저 세운 뒤 실제 입력과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계산한다.
예측이 맞으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틀리면 오차를 수정하며 현실을 업데이트한다.
마치 영화 영사기가 다음 장면을 미리 돌려놓듯, 뇌는 끊임없이 ‘앞’을 예상하며 화면을 재생한다.
어두운 복도에서 “뭔가 나올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상대의 표정을 보고
“기분이 나쁘다”고 판단하는 순간도 사실은
뇌가 먼저 그려놓은 시뮬레이션의 결과다.
처음 VR 기기를 썼을 때, 나는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발끝 너머를 내려다보는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고 무릎에 힘이 풀렸다.
몸은 현실처럼 반응했고, 그 반응은 의지로 멈출 수 없었다.
최근 2025년형 Apple Vision Pro를 직접 체험했을 때도 비슷했다.
공간에 떠 있는 창과 사물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현실의 벽과 가상의 화면 사이 경계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감각이 설득당하면 뇌는 망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VR 속 절벽과 방 안의 바닥은 결국
같은 무대 세트다.
하나는 ‘가상’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현실’이라 불릴 뿐이다.
차이는 내가 어느 이야기에 더 깊이 몰입하고 있는가에 있다.
딥페이크 영상이나 AR 게임 같은 기술들도 같은 교훈을 준다.
뇌가 현실과 가상을 가르는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안정하다.
그렇다면 “이건 현실이다”,
“이건 착각이다”라고
판단하는 주체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게임 속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그 캐릭터를
조종하는 플레이어일지도 모른다.
한쪽은
이야기 안에 묶여 있고,
다른 한쪽은
이야기 바깥에서
다음 장면을 선택한다.
삶이 유난히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그 틈이 잠시 보인다.
나는 무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관객석에 앉아
나 자신을 바라본다.
현실은
이미 완성된 영화가 아니라,
매 순간 편집 중인 장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실은,
우리가 믿기로 선택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의 이야기를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같이 질문해보기>
• 내가 “분명히 봤다”고 믿었지만,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 지금 내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실제 외부 세계일까, 아니면 기억과 감정이 덧입혀진 내 뇌의 해석일까?
• 만약 인식이 예측과 해석의 결과라면, 나는 내 세계를 의도적으로 편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