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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Sep 16. 2019

베푼 친절이 무례함으로

연습과 실험이 필요해

  처음 만나거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편견 없이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법이니까. 그런데 간혹 같은 친절로 되돌려받지 못할때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본인의 일을 은근슬쩍 떠넘기는데 나의 친절을 이용한다고 느껴질 때는 '애써 친절해서 무엇하나' 회의감이 들고 사람에게 급격히 실망하게 된다. 이런 부정적 감정들이 여러 차례 쌓이니까 마음속에 갈등도 생긴다. 타인에 대한 친절한 태도를 계속 유지 할 지 말 지를 결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아이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끔 아이네 반 엄마들이랑 만나는 저녁 술 모임이 있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학부모들 모임에선 으레 아이의 학교생활 두각 정도가 엄마들의 이야기 지분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모르는 얼굴들끼리 통성명이 오가고 이야기 지분이 가장 많은 엄마가 나이를 물어가며 언니, 동생 서열을 정하더니 동갑인 나에게는 약한 콧소리를 섞어 '자기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모임 내내 어른 옷을 입은 아이처럼 말투와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불편했다. 그이는 정말 내가 말할 때 맞장구도 적절히 쳐주며 정말 금세 친해진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다 아이들 체험학습 도시락 싸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일하는 엄마였던 그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에게 자기 아이 도시락을 싸 달라고 요청했다. 호칭 때문에 급하게 친한 척하던 나는 마지못해 그러마 하고는 술집 문을 나서면서부터 후회를 시작했다. 솜씨가 없어 내 아이 것도 싸기 어려워 버둥거리면서 왜 그렇게 쉽게 응낙을 해버렸는지... 억지스러운 친절을 가장해 뭔지 모르게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게 영 씁쓸했다.


  또 한 번은 지역의 어떤 행사 준비를 하는데 배정된 일이 많아 힘겨워 보이는 분이 계시길래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선의로 그분의 일을 선뜻 나서서 도와드렸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분이 당황스럽게도 그다음 행사에서 나를 부르시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이 일 저 일을 시키는 게 아닌가. 선의로 베푼 나의 친절을 호구로 여기고 쉽게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을 부정할 수 없었고 떨떠름했다. 아마도 그분은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저 내가 너무 주관적인 감정에 빠져 잘못 판단한 건지도 모른다. 여하튼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을 계속해야 하나 또 갈팡질팡 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연히 힐링캠프라는 예전 프로그램을 보는데 놀랍게도 진행하던 한혜진 씨가 나와 똑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고. 오히려 까다롭게, 어렵게 대할 때 상대방이 더 조심스럽게, 더 신경 써 주는 모습을 보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고민이었다. 답을 주시던 법륜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게 친절을 베풀고 일일이 한 건, 한 건 신경을 쓰지 말고 좀 손해를 보더라도 꾸준히 계속해야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이익이라고 하신다. 까다롭게, 까칠하게 대하면 일시적으로 효과는 볼 수 있겠으나 언젠가는 결국 그 과보를 돌려받게 된다고... 아, 스님의 답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성에 차지가 않는다. 내 그릇이 그리 크지 않은데 어찌 상처를 입으면서도 계속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스님, 손해 보면서 살기 너무 어려워요...)


  현실적인 대처법을 찾다 보니 정문정 님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 눈에 띈다. 주로 무례한 언사로 상처를 받았을 때 대처법들을 이야기하는데, 나의 경우들에게도 참고할 만한 방법들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머, 도시락이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하하하" 웃으면서 되물으며 문제가 되는 행동임을 상기시켜 줄 수도 있겠고 또는 "그럼 저희 애 후식은 당연히 챙겨주시는 거죠?"라며 상대의 무례함을 그대로 되돌려 줄 수도 있겠다. 당연한 듯 이것저것 시킬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무성의하게 반응하는 것도 방법일 수도 있겠고. 스님의 해법보다 훨씬 실천 가능한 현실적인 대처법들이라 반갑다. 비슷한 일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고민해서 나온 지혜를 나눠주는 작가님이 고맙다.


  바로 써 먹을 수 있는 지혜를 찾았지만 사실 실천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삶은 언제나 연습이고 실험이란다. 연습 삼아, 실험 삼아 용기를 내어 한 번, 두 번 대응하다 보면 몸에 배이지 않을까. 모나게 살지 않으려고 무례함에 침묵하고 목소리 내지 않는다면 그런 무대응이 상대방의 무례함을 키우는 데에 기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무례함에 쉽게 상처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친절함을 베풀 내공도 쌓아야겠지만, 더불어 무례한 걸 무례하다고 웃으며 목소리 내는 일도 연습할 일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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