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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Sep 08. 2019

요즘 나는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며 즐기는 것들

  요즘 나는 돈 버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한 7, 8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취하다 보니 목디스크가 왔다.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뒷목과 어깨 부분이 뻗뻗하게 굳으면서 아팠다. 심한 날은 누워서 몸을 옆으로 돌리지도 못했다. 평생 이렇게 아프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한 1년 쉬다 보니 신기하게도 아픈 증상이 서서히 사라졌다. 남편에게 아프다는 핑계를 당당히 대고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결혼하고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가지는 여유다. 아니, 경제적 염려나 진로 고민 없이 온전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탐색하고 시간을 보내보기는 지금껏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직장이 있는 남편을 의지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40대 부부는 위기 아니면 권태라는데, 일을 안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남편이 사뭇 고마운 존재가 되어간다. 부부관계가 위기로 치닫는 걸 막아주는 훌륭한 결정인지도 모른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에 매이지 않으니 가사노동 시간을 빼고는 온 시간이 내 시간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나의 시간은 곧 그들의 시간이었는데, 이젠 그때만큼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의식이 높아져가는 청소년 시기에 세세한 잔소리는 오히려 역효과이기에 그들이 내 영향력 밖으로 나가는 만큼 나도 줄을 느슨하게 풀고자 노력한다. 그러다 줄을 아예 놓을 날이 오는 것도 대비할 일이다. 여하튼 이러다 보니 관심이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향한다. 내가 재미있어하는 일이 뭔가 새삼스레 떠올려 본다. 사실 영어도 내가 좋아하는 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학창 시절에도 왠지 자신 있었고 결혼 후 미국도 들락거리다 보니 읽는 영어뿐 아니라 말하는 영어의 매력에 푹 빠져 잠시나마 업으로까지 삼기도 했던 것이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동안 열심히 써먹었으니 당분간 영어에 대한 관심은 이제 순위에서 한참 밀린다.


  여행도 좋아하는 목록 중 하나였다.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고, 지금 오늘을 사는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나의 여행법이 잘못되어 그런지 요즘 여행이 시큰둥하다. 가기 전 예약하는 데서 이미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예약하면서 이미 여행지의 경관과 할 경험을 시뮬레이션하며 다 체험해 본 느낌이 든다. 막상 여행지에 가보면 새롭다기보다는 예약할 때 상상했던 바와 맞춰보며 재탕하는 기분이다. 다녀온 뒤의 빨래며 짐 정리도 짐스럽다. 그래서 요즘은 계획 없이 가볍게 문득 떠나는 일상 속 혼자만의 외출이 더 설렌다. 아침 일찍 조조 영화를 보러 간다든지, 동네에 새로 생긴 예쁜 카페에 들러 본다든지, 공기 맑은 어느 날 한강의 일몰이 기대될 때는 버스를 타고 동작대교 구름카페나 노을카페에 가도 좋다. 불그죽죽 물이 든 한강의 물결과 하늘, 푸르스름하게 어스름 내린 빌딩 숲이 어우러진 서울 풍광에 넋을 잃는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누굴 만나 담소라도 나누게 되면 그대로 특별한 순간, 특별한 날이 된다. 예기치 않게 만나는 게 꼭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어느 주말 마르쉐 혜화 장터에서 맛볼 수 있는 화덕에 구운 인도 난일 수도 있고, 손으로 짠 앙증맞은 꽃무늬 귀걸이 한쌍일 때도 있다. 축제에서 만난 밴드 '어디든 프로젝트'의 신나는 노래 리듬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고, 대사 한마디 없는 손뜨개 놀이 일인자의 공연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것도 좋다. 쓸데없는 데 기 빨리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의 기분과 느낌에 집중하게 되는 진짜 충전의 시간. 예전에는 몰랐던, 스스로 좋은 에너지 가득 채우는 법. 숨겨진 보물을 찾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은 단연 독서모임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생각을 나누는 일은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즐겨하는 일이다. 독서모임의 최장점은 좋은 책을 만나 생각거리를 얻고, 사람들과 대화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며, 내면의 성숙을 향한 성찰의 자세를 견지하게 되는 점이다. 신변잡기의 이야기도 그 사람을 드러내지만 이런 주제가 있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깊이를 느끼게 되고, 나 자신의 생각도 더욱 명료하게 가다듬을 수 있어서 나에겐 공기와 같다. 그런데 요즘 독서모임을 하다가 문득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꾸 남을 가르치려 드는 지적 오만함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입을 좀 닫을 때인가 보다. 말을 줄이고, 정말 안다면 몸으로 실천해 내 보라고 자꾸 속에서 말을 건넨다. 그래서 또 그리 살아보려고 게으른 나와 치열한 밀당 중이다.


  독서모임 외에 요즘 내가 빠져있는 일은 글쓰기이다. 글을 쓰면서 일어나는 사유의 과정이 적성에 맞는 것 같고, 필요한 부분은 넣고 군더더기는 걷어내느라 최대치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하다. 졸작이지만 한 편, 한 편 완성한 후에 읽고 싶을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보는 것도 즐겁다. 이리 즐기면서 오래 하다 보면 혹시 글쓰기로 돈도 벌 수 있을까... 얼마 전 집 근처에 들어선다는 아파트 단지의 모델하우스를 보고 왔는데 이상하다... 물욕이 안 생긴다... 돈을 벌려는 의지가 아무래도 약한 것 같다.


  100세 시대란다. 심지어 죽지 않는 영생불멸의 시대가 온다고도 한다. 여전히 앞날에도 남편에게 의지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10년쯤 뒤에 다 큰 자녀들에게 외롭다고, 심심하다고 질척대지 않을 자신은 있다. 지금 내가 즐기는 것들이 나의 노후대비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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