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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05. 2019

일일찻집 기타 공연 보다가

쿨한 엄마, 생각나네요.

  주민센터 강당에서 하는 연말 일일찻집에 갔다. 무대에 6,70대 남, 녀 어르신들이 공연을 하신다. 아코디언 연주가 끝나자 또 다른 예닐곱 분이 일렬로 들어오셔서 통기타를 치시며  <솔개>와 <사랑하는 마음보다> 같은 곡들을 부르신다. 쑥스러워 관객들 쪽은 잘 못 보시면서도 시종일관 다정한 미소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박자와 노랫말을 맞추신다. 마치 세상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으신 듯 얼굴에 빛이 나고 행복해 보이신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선보이며 맘껏 즐거워하시는 그 모습에 보는 내 마음도 환해진다. 10년 후 내 모습일까 싶어 지며 왠지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그 생각 끝에 다른 도시에 사시는 엄마 모습이 겹쳐진다.


  엄마도 통기타를 취미로 배우신다. 가끔 지역축제 무대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사진과 함께 보내주시기도 한다. 거의 35년여를 직장에 다니시고 퇴직하신 지 이젠 한참 되시는데 건강한 편이시다. 새벽 운동은 필수 일과시고, 기타 배우시며 노래도 부르시고, 요즘엔 좀 뜸하신데 그 바쁜 해외 패키지여행 일정도 거의 무리가 없다. 개봉 영화는 거의 빼놓지 않고 보시고, 안경 끼고 신문기사를 요목 조목 뜯어보다가 필요한 부분은 공책에 기록을 하신다. 라디오 들으시며 영어공부도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무슨 무슨 모임도 참 많으시다. 여전히 활력이 넘치신다. 그런데 내가 정작 부러운 건 그런 엄마의 활력 넘치는 에너지가 아니다. 엄마의 예민하지 않은, 어떻게 보면 좀 둔한 마음이다.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엄마가 내 방에 한참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와 물어보셨다. "엄마, 이혼하고 싶어. 이혼해도 될까?" 뜻밖이었지만, 그간 엄마 삶의 괴로움과 고단함을 목격해 온 나로서는 진작에 내렸어야 할 결심이셨기에 대찬성이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이혼하지 못하셨다. 그저 10년 지나, 20년 지나 한 번씩 그때 엄마의 이혼을 지지해 준 건 나밖에 없었다며 나한테는 고마움을, 하지 말라고 했던 남동생들에게는 못된 놈들이라는 욕을 지나가는 말로 하시는 걸로 끝냈다. 그러고 또 힘차게 하루하루 오늘까지 살아내고 계시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18년밖에 차이 안나는 성질 괴팍한 시어머니 수발과, 세상 예민한 데다 잊을만하면 예측 불가능한 분노를 폭발시키는 남편, 그리고 제일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의 배신 중에서도 말이다.


  엄마는 확실히 나보다 더한 고통과 괴로운 인생역정을 사셨음이 분명한데, 도대체 어떤 힘으로 그 삶을 헤쳐올 수 있었을까 문득 생각해 보곤 했다. 내 관찰에 따르면, 엄마는 기본적으로 고통이나 자극에 나보다 좀 둔했던 것 같다. 둔해서 좋은 점은 자식들에게 엄살이 거의 없는 점이다. 젊으셨을 때부터 몸에 어디가 아프셔도 "뭐, 이까지 것. 대수라고." 하시며 며칠 약 드시고 병원 좀 다니시고 대번 이겨내신다. 어떤 일로도 나 좀 어떻게 해달라고 자식들에게 투정 부리시거나 징징거리지 않으신다. 한마디로 독립적이고 쿨하게 처신하신다. 자식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몸에 익어 그런지도 모른다. 반대로 엄마의 쿨함이 상처가 될 때도 있었다. 내가 좀 어디가 아프거나 마음이 힘들 때, 엄마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의지라도 할라치면 따뜻하게 받아주실 때보다 "너는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니? 참.." 하며 이해를 못하셨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서러울 때도 분명 있었지만, 엄마의 이런 둔감함은 어찌 됐든 엄마의 삶을 헤쳐오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 일 것이다.


  무엇보다 삶을 오늘날까지 건강하게 헤쳐 온 엄마의 결정적 비결은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 속에 마음이 침잠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빠른 마음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초등 5학년 때인가, 저녁 무렵 암으로 투병 중이시던 젊은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놀랍게도 엄마는 전화를 끊고 하려던 머리감기를 계속하셨다. 앉아서 머리를 대야에 내려뜨리고 엉엉 우시며 비누칠을 하시는 거다. 그날 밤 내가 본 엄마의 슬픔 표현은 그게 다다. 아무리 전날 밤에 만취한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 속이 말이 아니어도, 다음 날 아침 5시만 되면 잠 못 자 빨간 눈으로 가족들의 아침과 출근을 준비하시던 분이다. 엄마 돈을 만만찮게 빼앗아 가고 결국 징역살이를 하는 막내아들 때문에 입에 쓴 맛이 가득해도 주저앉지 않으신다. 늘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나 기운을 차려 운동을 가시고, 밥을 하시고, 외출을 하시고, 모임을 나가시고, 노래를 하시고, 영화를 보신다. 나라면 엄마처럼 살아낼 수 있었을까...


   고난에 단련이 안 돼 마음 근육이 약한 나는 고난이나 위기가 다가오는 듯하면, 전전 긍긍하며 바로 일상에 티가 난다. 잠을 못 자고, 외출을 삼가고, 고심 고심한다. 필사적으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생각해 보고, 나름의 마음가짐과 입장을 정리하고 나서야 일상으로 간신히 마음을 조금 돌릴 수가 있다. 게다가 속상한 걸 꼭 끄집어 내 속상하다고 말하고, 내 입장에서 부당한 건 부당하다고 뱉어버리는 성향까지 있다 보니 마음 평안한 날들을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 말로, 아빠를 고대로 닮아 예민해서 그렇단다. 나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난 엄마의 둔감함이 자주 부럽다. 괴로운 가운데 괴롭지 않게 빠른 마음 전환이 가능한 엄마의 내공이랄까, 천성이랄까 내게 없는 그 부분이 못내 부러운 거다.


   엄마만큼의 둔감함이야 타고나지 않았지만, 빠른 마음 전환은 오랫동안 노력하는 중이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생각을 빨리 다른 데에 옮기려고 말이다. 아무리 기분 좋은 일이 여러 가지 있어도, 비슷한 비중의 기분 나쁜 일 한 가지가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기분 나쁜 일에 더욱 마음을 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엄마와의 좋은 기억 10개는 대번 말 못 하면서 서운한 것 1개는 아무리 커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사람 심리가 보통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내공을 쌓고 싶다. 내 마음이 부정적임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 와중에 흘러가는 기분 좋은 일상을 놓치지 않는 연습으로 말이다.

 

"엄마, 오늘도 운동 잘하시고, 모임 잘 나가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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