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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Apr 27. 2020

날 단련시킨 첫 번째 세상

  삶에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 한편으로 긴장되고 걱정되면서도 '누구를 만나게 될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같은 기대로 쉽사리 마음이 달뜨기 때문이다. 많은 시작들 가운데서도 첫 직장은 누구에게나 강렬한 기억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때까지 속해있던 안전하고 익숙한 세계로부터, 온통 낯설기만 해서 어느 것 하나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 속으로 조심스레 첫 발을 들여놓는 시간이니 말이다. 내 기억 속의 첫 직장도 그랬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 어느 때쯤, 살던 도시를 떠나 수원에 부모님 도움으로 자취방을 얻었다. 연구보조원이라는 계약직으로 취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76만 원인가 밖에 안 되는 월급이지만, 졸업하기도 전에 교수님 추천으로 취업이 되었다는 괜한 자부심과, 처음 해보는 독립생활에 진짜 어른이 된 양 의기양양했다. 낯선 길을 익히느라 예행연습차 직장까지 미리 버스를 타고 가서 보게 된 20층쯤 되어 보이는 새 빌딩의 말쑥함에 압도되면서도 그곳에서 펼쳐질 멋진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상상이 끝도 없이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이 상상처럼 찬란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구원이라는 직장의 특성상 주변 사람들은 국내 유명 대학들은 물론, 들어봤음직한 외국대학 출신의 박사님들이 대부분이었고, 연구보조원직 조차 박사과정을 염두에 두고 이미 석사를 마쳤거나 석사과정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학 졸업했으니 '공부는 이제 내 삶에서 안녕'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던 지방 대학 학사출신이 쉽사리 얼쩡거릴 곳이 아니라는 불안이 강하게 엄습했다. 정말로 업무를 시작해보니 일에 필요한 지식과 감이 많이 딸렸고, 인터넷이나 캐드 같은 기술도 미숙해서 담당 박사님으로부터 "자넨, 여태까지 뭘 배웠나?"같은 자존심 상하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 나를 믿고 직장을 추천해주신 모교 교수님께 죄송스러웠다. 당연히 새로운 시작의 설레던 마음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심지어 그 도시 전체가 나만 유독 냉대하는 게 아닌가 싶은 과대망상 비슷한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금요일만 되면 나도 모르게 부모님 댁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끊기 일쑤였다. 가서 말도 안 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엄마 밥이라도 양껏 먹고 좀 뒹굴거려야만 그다음 주를 버텨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분들의 도움으로 업무에 익숙해지려 노력하며 버티던 어느 날, 담당 박사님이 부르셨다. 그간 고생했다고 엄청 생색을 내며 명절 보너스라고 흰 봉투를 건네주신다. '에고, 못난 나를 그래도 챙겨주시는구나!' 싶어 감격하는 마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화장실에 달려가 조용히 열어보니 만 원권 2장이었다. 안 주셔도 되는 걸 개인적으로 챙겨주신 것에 고마우면서도, 대개 홀수로 넣기 마련인 금일봉 관행에 비추어 만원이면 만원, 삼만 원이면 삼만 원이지, 이만 원은 뭘까 싶었다. 혹여 만 원권 세 장을 넣으려다가 내 역량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냉정한 판단 아래 한 장을 빼신 게 아닌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급격히 심난해졌다. 스스로가 보너스 3만 원의 가치도 안된다니 어찌나 부끄럽고 초라해 보이던지... 결국 나도 공부를 더 해야 제대로 사람 역할할 줄 알고, 사람대접도 받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6개월 만엔가 첫 직장을 그만두고 그 해 12월에 있는 대학원 진학 준비를 시작했다. 독립한다길래 자취방까지 얻어주었더니 고작 6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는 자식이 무에 그리 믿음이 가셨겠냐만 부모님은 또 생활비를 보내주셨다. 면목없었지만, 별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도보로 한 20여분 쯤 거리에 있는 공립 도서관에서 하루 평균 11시간 또는 12시간씩, 매일매일 시계 추처럼 공부하러 다녔다. 지금 돌아봐도 그때처럼 사력을 다해 공부했던 적은 그 이전이든 그 이후로든 다시는 없었던 것 같다. 공부하다가 문득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이 차오르면, 연구원에서의 서러웠던 일을 떠올리고, 대학원 실패 후의 기약 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연말에 원하는 대학원에 합격하였다. 그간의 괴로움을 깨끗이 씻어내고도 남을 정도로 기뻤고, 부모님과 모교 교수님들께도 마음의 빚을 갚는 기쁜 소식 전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결국 나의 어쭙잖은 첫 직장생활은, 세상이라는 바위에 물정 모르고 홀로 애써 부딪치다가 못 버티고 튕겨나간 경험이었고, 난생처음 자발적 동기를 가지고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진한 6개월을 거쳐, 대학원이라는 또 다른 낯선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하는 징검다리의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대학원 이후의 삶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첫 직장시절이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것이 날 단련시킨 첫 번째 세상이었기 때문일 거다. 지금도 사회 진입의 출발 라인에 서서 걱정하거나 설레고 있을 새내기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어설펐던 나의 시작을 공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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