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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y 06. 2020

생활 속의 '주민 자치'에 도전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에 참여하며

이사 오기 전 살던 곳은 113세대의 한 동짜리 작은 아파트였다. 놀이터에 아이들 데리고 나온 비슷한 연배의 엄마들이랑 얼굴을 익히고, 통성명을 하며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공통 관심사로 관리비나 경비 문제, 아파트 안팎의 쓰레기 처리 문제 등이 자주 화제에 오르내렸는데, 그중에서도 관리소장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주민들이 일이 있어 찾아가면, 퉁명스럽다 못해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까지 한다고 진즉부터 원성이 자자하다는 이야기였다. 옆집 애기엄마도 관리소장에게 험한 말과 삿대질을 당했다고 분개해했다. 그런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당장 내 살기에 급급해 '에고, 아파트 일에 뭔가 고칠 게 많은가 보구나...!' 하며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 저학년이던 딸아이가 친구들을 우르르 데리고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 놀러 왔다. 아이들이 신나게 잡기 놀이도 하고 몰려다니며 놀고 있을 때, 관리소장이 나타났단다. 다짜고짜 "너희들, 여기 살아? 이 아파트 살지 않는 애들은 빨리 집에 가."라고 사납게 퍼부으며 아이들을 쫓아냈단다. 딸 친구들이 우물쭈물 억울해하며 떠났다는 딸의 이야기를 듣는데 살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잖아도 들은 얘기가 많아 곱게 보지 않던 소장인데, 이젠 놀이터에 놀러 온 아이들까지 막무가내로 쫓아내다니! 당장 내려가 따졌다. "아이들 놀라고 지어 놓은 놀이터에서 왜 아이들을 쫓아내느냐", "아파트 사는 애들만 놀으란 법이 세상에 어딨나. 친구들인데 같이 놀아야지."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이들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도 있거니와 새로 단장한 지 얼마 안 된 놀이기구들이 파손될 우려가 있어 그랬단다.      


그럼 아이들을 잘 타이르거나 관리 감독할 부모를 부를 수도 있을 텐데, 뭣하러 애써 놀이터를 새로 지어 놓고 아이들을 쫓아낸단 말인가. 관리주체로서 시설물에 대한 관리 감독도 중요하지만,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비상식적으로 무턱대고 일을 처리하는 게 참 답답했다. 그간 아파트 일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결국 아이들에게 상처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어 어른으로서 부끄럽기도 했다. 아파트 일에 발 담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관리소장의 그런 안하무인격 태도는 견제하고 감독할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가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라고 판단되었다. 재건축 아파트 조합장을 맡으셨던 어르신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몇 년간 주욱 회장직을 맡고 계셨는데, 그분의 묵과 하에 아파트의 여러 일들이 꼼꼼한 살핌 없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몇몇 가까운 이웃들과 매달 나오는 관리비 고지서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관리 외 수익은 무엇이고 잡지출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인건비는 얼마나 나가는지 등등... 다른 아파트의 관리비 고지서와 비교도 했다. 관리비 내역 중 의심스러운 부분들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증거도 모았다. 게시판에 붙여진 홍보물들의 매달 게시건수를 사진을 찍고, 금액을 세어 월말 관리비 고지서에 나오는 내역과 비교해 보니 맞지 않았다. 적은 세대수에 비해 입주자 대표회의 운영비로 너무 많은 액수가 나간다고 판단되었다. 사실 회의는 제대로 열리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형식적인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를 제대로 재건하는 게 급선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아파트 관리규약을 받아다가 공부도 시작했다.     


그간 논의한 결과를 가지고 반상회를 열어 더 많은 주민들을 만나기로 했다. 아파트 게시판에 직접 반상회 공지를 붙이자, 관리소장이 이런 모임을 무엇하러 하냐며 반대 같지 않은 반대를 했다. 아파트 일에 대한 주민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게 역력했다.      


첫 모임에 20여 가구 정도 모였던 것 같다. 참여한 가구수는 많지 않았지만,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도 몇 분 오시고 3, 40대 젊은 엄마들도 왔다. 그동안 우리끼리 조사한 내용을 말씀드리는데 그게 뭐라고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의심스러운 관리비 사용내역이라든가 앞으로 어떻게 아파트 일을 해 나갔으면 좋은지 각자 희망사항들을 폭넓게 나눠보는 자리였다. 의견을 나누다 보니 입주자 대표회의를 잘 세워보자는 데에 동의가 되었다. 대표회의가 구성이 될 때까지 반상회는 정기적으로 열고, 당분간 부녀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일의 진행을 맡기로 했다.     


우선 현재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직을 맡고 계신 어른댁에 음료수를 사들고 이웃과 방문했다. 혹시 우리의 의견이 노여우셔서 역정을 내시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산더미처럼 하고 갔는데, 사근사근하게 말을 잘하는 이웃 덕분에 선뜻은 아니지만 마지못하게라도 회장직을 내놓으시겠다고 하신다. 직설적이어서 종종 작은 일도 큰 일로 만들어 버리는 나로서는 이웃의 정감있는 말솜씨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구회장님께도 알려드렸으니, 이제 마음 놓고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를 맡아줄 라인 대표님들을(동이 하나다 보니, 라인별로 대표를 뽑는다) 물색하기 시작했다.      


연배 지긋하신 남자 어른들에 관해선 관심은커녕 안중에도 없었는데, 아파트 일에 관여하다보니 은퇴하고 시간 여력이 있으신 남자 분들이 아파트에 꽤 많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변에 인품을 물어물어 좋은 분이 계시면 직접 방문하여 적극적으로 대표직을 부탁드렸다. 그렇게 뜻있으신 남자 3분, 여자 1분을 꾸려, 가가호호 설명을 드리고 찬성 서명을 받으러 이웃들과 다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내가 돌본다는 마음에 뿌듯하기도 했다. 마침내 새로운 입주자 대표회의가 구성되었고, 드디어 그 말 많고 탈 많던 관리소장도 1년 후에 당당히 그만두게 할 수 있었다.     


스스로 공동체 의식이 뛰어나다거나 오지랖이 넓은 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오는 일상의 문제를 무심하게 넘기지 않고 주민들과 논의하여 옳게 바꿔 보려고 마음을 내었을 뿐이다. 생활 속의 작은 '주민 자치'를 해 보았다고나 할까? 다른 분들께만 입주자 대표회의를 부탁하기가 염치가 없어 나중엔 나도 입주자 대표회의를 맡아 2년 동안 아파트 살림을 보았다. 힘든 만큼 많은 것들을 배운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파트 일하면서 가지게 된 내가 사는 곳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자연스레 내가 사는 동네, 마을 일로도 퍼져나가 마침 동네에서 주민자치회라는 기구를 구성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주민자치회의 분과활동을 활발히 참여하며 쿵짝쿵짝 마음 맞춰 숲 요가도 해보고, 마을 그림대회도 열고, 낡은 계단도 색칠했다. 몸은 좀 힘들지 몰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참 개운했다.


세상일이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 같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기 사는 곳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옆 집, 앞 집 이웃들의 애정 어린 봉사와 나눔 덕도 컸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파트 일이든, 마을 일이든 참여하면서 나부터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건 덤치고 귀한 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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