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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y 11. 2020

고마움은 잘 잊히고 서운함은 오래가는게 사람마음인가봐요

  고마운 분들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할 날이 많은 5월이다. 어린이날이라고 지방에 사시는 엄마가 애들 용돈을 보냈다고 문자를 주셨다. 우리 집 애들은 정확히 어린이가 아닌지도 꽤 되었건만, 그래도 손주들이라고 기어코 매년 어린이날 용돈을 보내주신다.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어버이날 용돈으로 내가 어차피 다시 보내드릴 걸 뻔히 아시면서 뭣하러 굳이 보내시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손주들에 대한 사랑 표현을 하고 싶으신가 보다 헤아려본다.


  보내주신 애들 용돈보다는 넘치게 다시 어버이날 용돈을 보내드리면서, 인터넷뱅킹을 옆에서 지켜보던 딸에게 무심결에 물었다. "너는 엄마의 고마움에 대해 뭐 없니? 참고로 난 선물보다 손편지가 더 좋은데." 아무 생각 없는 어린 딸내미인 줄 알면서도 공연히 옆구리를 찔러본다. "아니,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구, 엄마는 뭘 바라고 그래요? 작년에도 학교에서 감사의 카드 제가 써온 거 받으셨잖아요. 뭘 똑같은 걸 매년 하라고 하는지 정말..." 그랬다. 분명 매년 애들 둘 다 어버이날 기념으로 감사의 카드 같은 걸 만들어서 가져오곤 했다. 아마도 선생님들의 채근에 못이겨 했겠지만, 카네이션 비스무리한 꽃도 그리고, 진심인지 장난인지 헷갈리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말 안 해도 내 맘 다 알죠?' 같은 문구들이 적힌 카드를 만들어 내 손에 쥐어졌었다.


올해는 학교를 가지 않으니 그마저도 구경을 못할 판이라 생각난 김에 내가 직접 선물이든, 편지든 내놓으라고 옆구리를 팍팍 찌른 것이다. 그런데 딸의 대꾸가 저 모양이니 갑자기 엄마로서의 자존심이 팍 상한다. 자식 키우며 본전 생각하는 부모는 되지 말자고 나름 결심하고 사는데, 나도 은연중에 애들에게 뭔가 대가를 바라는 별 수 없는 속물인 속내를 들킨 듯싶다. 그저 평상시 고마웠다는 마음 한 자락 보여주면 좋겠다는 건데, 그걸 저리 형식적이고 매몰차게 반응을 하다니 자못 가슴이 싸늘해진다. 제 일이라면 열 일 제쳐두고 나서는 이 어미의 정성을 몰라주고 받는걸 당연하게만 여기는 딸내미의 얌체 같은 성미가 야속하기만 하다.


  본디 자식은 다 부모 하는 양을 보고 배운다 하였으니 그간 내가 내 부모님께 모질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냉정했던걸 보고 배운 건지 뜨끔하다. 어버이날은 물론 명절이건, 생신이건, 이런저런 이유로 찾아뵙지는 않고 습관적으로 용돈과 문자만으로 인사치레를 하고 마는 내 행태에 과연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진심은 들어 있었는지 새삼 돌이켜 본다. 잘 키워주신데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짐에 앞서, 남동생들에 비해 더 못 받았다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한동안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결혼하고 살기 어려울 때 딸은 출가외인이라면서 선을 딱 그으실 때, 외손주는 자신의 자손들이 아니라는 말을 딸 앞에서 서슴없이 뱉으실 때, 말도 못 하고 서러웠다. 기습적으로 찔린 상처들은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채 서서히 부모에 대한 냉랭함으로 바뀌었고,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당연히 왕래와 교류는 적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식들을 보며 어떤 생각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 마음이 신기한 게, 다른 사람에게 받은 고마운 일은 쉬이 잊게 마련이고, 상처 받은 일, 마음 아팠던 일은 웬만해선 잘 잊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내가 자식에게 일상적으로 한없이 베푸는 크고 작은 일들이 아이들에게는 고마운 일로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부분은 당연하게 받을 걸 받는 일인 것이고, 고맙다 하더라도 쉬이 잊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대신 가끔 있었던 나의 실수로 상처 받은 일에 대한 기억들은 오 년이 지나도, 십 년이 지나도 어찌나 또렷이 기억해내는지 놀라울 뿐이다. 기회만 되면 그 일들을 들추어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가 있었냐."며 어찌나 따져대는지... 그저, 생각이 짧았던 잠깐의 실수였는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자식들이 참 가혹할 때가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내가 부모님께 서운해했던 것도 딱 이런 심리가 아니었을까?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받아왔던 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서 마음에 잘 남아 있지 않고, 몇 가지 아프고 서운했던 일들을 전체인 양 치부해버렸던 건 아닌지 말이다. 고마운 걸 고마운지 잘 모르는 것 같은 딸내미를 보며, '아, 저 야속한 딸이 바로 나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동시에 부모님께 죄송해지며,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부모님께 고맙다는 표현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사시는 곳 주변 꽃집에 전화를 걸어 꽃바구니 배달을 요청했다. <어버이 은혜 감사합니다. 딸 올림> 띠를 둘러 말이다. 표현은 진부하지만 내겐 근래 어느 해보다 진심을 꾹꾹 담은 문구였다. 잠시 후에 꽃바구니를 받으신 엄마가 사진을 보내주시며, 딸 본 듯 볼 때마다 이쁘다는 문자를 보내셨다. 냉랭하게 얼어있던 마음 한 조각이 따뜻함에 녹아 맑은 물이 되어 흘러 내려가는 듯하다. 내친김에 5월이 가기 전, 부모님 얼굴도 뵈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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