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명절 생존 매뉴얼

어른을 위한 짧은 우화 #16

by 이루나

'고슴도치 가문의 명절 생존 매뉴얼'은

세대를 거쳐 발전해 왔다.


명절마다 살아남은 고슴도치들이

비밀리에 업데이트해 온 생존 비법이 담겨있다.


[파일명] 고슴도치 가문 명절 생존 매뉴얼 시리즈

2025_사회초년생 ver

2025_며느리 ver

2025_눈치 없는 삼촌 ver


그중,

가장 따끈한 버전은 올해 입사한 고슴도치가

리뉴얼해 작성했다.



==[사회초년생 고슴도치의 매뉴얼]==

++ 오늘도 헤드셋은 무음입니다. ++


올해 갓 취직한 고슴도치는

이번 명절에

일부러 '커다란 헤드셋'을 챙겼다.


이건 음악을 듣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말 걸지 마세요'라는 뜻의 나름의 방패였다.


"어디 회사 들어갔다고?"

"거기가 뭐 하는 회사라고?"

"그렇게, 취업이 안되고, 알바만 하더니.."

"요새 취업이 어렵다곤 하더라."

"근데, 쉬는 청년 많다더라. 다들 약해빠져서.. 쯧.."

"그래, 연애는 안 하고?"


고슴도치는,

헤드셋을 뚫고 들려오는

친척들의 질문 폭격에 어질어질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2초 정도 친척 어른의 얼굴을 응시했다.


잠시동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멍—해졌다.


마치 코로나 때 '마스크'를 다시 쓴 것처럼.


디지털 콘텐츠로 이미 감정이 피로해진

고슴도치는 무표정한 눈빛만 전달했다.


마스크처럼 표정은 덮었고,

헤드셋처럼 귀는 막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다.


'어른들은,

이런 나의 소극적 방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아.'

'그냥 무례하다고 생각하겠지?'

'근데, 다 자기 할 말만 하잖아.'


'나는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내 표현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고슴도치는 생각이 많아졌다.


작년, 취준생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모은 아르바이트비로 명절에 여행을 떠났었다.


다 같이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라

내심 양심에 걸렸는데,

기대와 달리,

작년에 오지 않았던 건 기억나지도 않나 보다.


그저,

청소년 때부터 자주 듣던

"공부는 잘하니?"라는 질문이,

"이제 돈 벌어서 결혼해야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초년생 고슴도치는

'말 돌리기 레벨업'을 시전 했다.


A: "요즘 연애는 하니?"

B: "삼촌은요? 소개팅했던 미모 고슴도치랑은 어땠어요?"


A: "결혼은 언제 할 거니?"

B: "결혼이요? 이모는 결혼 만족도가 몇 퍼센트세요?"


매뉴얼도 수정했다.


<명절 생존 준비물>

- 커다란 헤드셋

- 젠지스테어 장착


<명절 생존 행동 요령>

- 헤드셋 착용 시, 가시 뾰족하게 세우기!

- 질문 오면 질문으로 되받아치기


그렇게,

사회초년생 고슴도치는 무기를 장착했다.


가시를 세운다는 건,

상처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라는 걸,

직장에서도,

명절에서도,

어른이 된 고슴도치는 이제 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례하지 않게 방어하는 방법'도 배우는 일이다.


==[며느리 고슴도치의 매뉴얼]==

++ 눈치는 8단이지만, 마음은 8조각입니다. ++


올해 결혼 3년 차.

며느리 고슴도치는 명절 전날부터

앞치마 안쪽에

'허리보호대'를 착용했다.


그리고 몰래,

가시에 '침'을 묻혔다.

'이번엔 말리지 않을 거야.'

'내 선은 내가 지킨다!'


며느리 고슴도치는 '전투준비태세'를 갖췄다.


앞치마에 숨겨진

허리보호대는 갑옷 같은 것이었다.


"아이는 빨리 낳을수록 좋지."

"둘째는 언제 가질 거니? 애가 외롭다니까~"

"애한테는 뭐든 다 잘 먹여야지"

"간이 너무 싱거운 거 아니냐."

"둘이 같이 벌어야지, 우리 아들 혼자 벌어서 되겠어?"

"어머, 내가 우리 며느리 눈치 보잖아, 호호호"


이번 명절도 역시나,

시어머니 고슴도치의 말이 비수를 꽂았다.


며느리 고슴도치는 굴하지 않고,

단단한 허리보호대로 가시를 막아냈다.


그러나,

시어머니 고슴도치의 기술도 만만치 않았다.

변화구처럼 요리조리 돌려가며 다시 날아왔다.


며느리 고슴도치는

2단계 전략인 '침 바른 가시'를 꺼내 들었다.


| "맞아요, 그렇죠~"

| "그렇겠네요."

| "하나 배웠네요."


며느리 고슴도치는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올라간 입꼬리와는 다르게

1도 진심이 아니었다.


그건 '침 발린 가시'가 하는 역할이었다.


침이 묻어 말랑한 가시처럼 보였지만,


사실,

가시에 바른 침은,

시어머니 고슴도치의 냄새를 다시 묻혀 위장한 것이다.

내 냄새는 숨기고,

상대방과 같은 냄새로 혼란을 주는 것이다.


표정은 부드럽지만,

그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건,

'좋아요' 공감버튼과 같은 '위장'이니까.


며느리 고슴도치는 이번 명절을 위해

3단계 '핵심 비껴가기' 기술도 배웠었다.


A: "애는 언제 가질 거니?

B: "요즘은 다들 계획을 세우고 갖더라고요~

물가도 높아서

분유랑 기저귀 값이 장난 아니던데요?

어머니 때는 어땠어요?"


A: "너도 같이 벌어서 살림에 보태야지~"

B: "그렇죠, 맞벌이해야 된다니깐요.

이모도 일 다시 하실 생각 없으세요?

요샌 70~80대에도

소소하게 일하셔야 건강에 좋대요."


A: "언니, 살이 좀 쪘네, 오빠는 살 빠진 거 같은데?"

B: "요새 그이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는지

다이어트하잖아.

근데, 시누는 피부가 더 좋아졌네~

가시도 더 윤택해졌어. 요즘 뭐 써?"


A: "전은 이렇게 부쳐야지,

음식은 해 먹고 사니? 남편 잘 먹여야지"

B: "오, 역시 다르네요.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다녀오신 여행 어떠셨어요?"


핵심은,

질문에 진심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연막을 피워, 화제를 전환하는 작전이다.

어색하지는 않아야 한다.


4단계인 '단호한 선 지키기' 기술은

아직 연마가 부족해 연습이 더 필요했다.


A: "이번에 산소에 같이 가야지?"

B: "죄송해요. 빨리 가고 싶은데,

차가 너무 밀려서 내일 갈게요."


A: "아니, 애가 말을 너무 안 듣네.

애 교육에 신경 써야지"

B: "명절이라 신나서 그래요.

저희가 가시 세워서 지켜보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며느리 고슴도치는 매뉴얼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명절 생존 준비물>

-단단한 허리보호대

-색이 진한 앞치마

-침 바른 가시


<명절 생존 행동 요령>

-눈웃음 필터 모드로 교체하기

-침 바른 가시로, 내 감정은 살짝 위장하기

-질문 핵심은 비껴가며, 유연하게 말 돌리기


명절 외교전의 최전선엔,

늘 며느리 고슴도치가 있었다.

'외교관'이나 다름없었다.


조각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고슴도치 가문의 평화를 유지한다.


남편 고슴도치에게,

평화유지군의 역할을 맡겼지만

결국,

이번에도 작전 개시 전에 철수했다.


애초부터 시댁은 다른 고슴도치 종족이었다.


그래서,

전략을 준비하고,

현명하게 가시를 활용하는,

고슴도치가 되어야 한다.


'방어술'은 기본 스킬,

'위장술'은 보조 스킬,

'연막술'은 전술 스킬,

'선긋기'는 심리 스킬.


... 그렇게, 며느리 고슴도치는

자신의 가시를 다듬으며

생존력을 업그레이드한다.



==[눈치 없는 삼촌 고슴도치의 매뉴얼]==

++ 가족도 좋지만, AI랑 더 친합니다. ++


어느덧 40대 후반이 되어가는

싱글남 삼촌 고슴도치는

'AI 눈치안경'을 챙겼다.


언젠가부터,

조카들에게 '눈치 없는 삼촌'으로 불렸다.


조카 고슴도치는

'아재개그'를 불쑥불쑥 내뱉는

삼촌 고슴도치의 얼굴을 외면했었다.


그때마다, 삼촌 고슴도치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췄었다.


'AI 눈치안경'은

조카 눈빛,

형수 미간,

어머니 눈썹 각도,

아버지의 성난 가시까지

실시간 감지한다.


"흠, 뭔가 부족한데.."

"그래, 긴급할 땐, 이만한 게 없지."

삼촌 고슴도치는

'명절용 스마트 워치'까지 챙겼다.


스마트 워치에

'용돈 송금'기능이 추가된 '최신형'이었다.


A: "삼촌, 결혼은 안 해?"

(워치: 심박수 체크 후, 진동)

B: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먹게 용돈 줄까?

(워치: 흔들기) 이체 완료했다!"


A: "너는 언제 장가가니~?"

(안경: 찌푸린 눈썹 감지, 예시 답변 안내)

B: "그 질문, 7년째 하시네요! 대단하세요."

"요새 챗GPT가 사주 봐주는데, 봐드릴까요?"


A: "큰집 둘째는 이번에 승진하고, 청약도 당첨됐데"

(안경: 경직된 미세한 입꼬리 감지, 예시 답변 안내)

B: "오! 잘 나가네요. 이번 명절은 큰집이 1위네요"

삼촌 고슴도치는 기기의 도움으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센스 있는 대처로 실패를 줄였다.


특히,

AI 눈치안경은 요즘 줄임말도 해석해서 알려줬다.


A: "와, 오늘 삼촌 가시가 느좋이네~"

(안경: '오늘 삼촌 가시가 느낌이 좋은데?')

B: "그렇지? 젊어 보여?"


A: "삼촌 윷놀이, 완전 감다살이네"

(안경: '윷놀이 완전 감이 다 살아있네.'

반대말 - '감다죽' 감이 다 죽었다)

B: "그럼~ 삼촌은 감다죽 아니라고"


그러나 때로는,

삼촌 고슴도치에게

'자가치유시간'도 필요했다.


"우리 애는 지금 만나는 고슴도치 있지~"

"막내 고슴도치는 대기업 들어갔다며?"

"그 집 며느리 고슴도치는 선생님이래"


본격적으로

친척들의 자녀 자랑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워치: 심박수 최대치, 진동)

삼촌 고슴도치는 워치의 반응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서

몸을 '공처럼 웅크리기' 전략을 실행했다.


(워치: 야행성 보호 모드 ON)

낮에 한숨 자고,

저녁에 일어나는 것도 도움이 됐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뾰족한 감정도 꺼내지 않았다.


삼촌 고슴도치는

눈치 있는 삼촌으로 거듭나기 위해

매뉴얼을 수정했다.


<명절 생존 준비물>

-AI 눈치 안경

-명절용 스마트 워치


<명절 생존 행동 요령>

-밤에 활동하고, 낮에 자기

-몸을 공처럼 말아, 내면 치유시간 가지기


그렇게,

삼촌 고슴도치는 또 하나의 명절을

가시 한 올 다치지 않고,

자신만의 특기를 활용하며

똑똑하게 보낸다.


'소프트웨어 버전명: 눈치 OS 3.0'

업데이트된 기기를 숙지하며...


.

.

.


한 자리에 모인

고슴도치 가족들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가훈을 되새겼다.


"가시를 세우되, 찌르지는 말 것."


그리고,


말은 아끼고,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생존력을 연구했다.


그렇게 고슴도치들은

이번 명절도 무사히,

다치지 않고 살아남기를 기도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서로에게

남보다 못한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절은 말과 시선이 오가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그 시간 동안,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뾰족할 수도, 웅크릴 수도 있다.


그래도 다행히,

저마다의 생존기술로

버텨내고 있을지 모른다.


명절마다

고슴도치처럼 예민했다면,

이번엔 모두가,

조금 덜 찔리고, 덜 피곤하길 바란다.


가족의 축제가 될지,

어른들의 전쟁이 될지는,

'배려'로 결정되지 않을까.


이번 한가위는

고슴도치도, 사람도,

조금 덜 아프길 바란다.


.

.

.


이번 명절, 여러분의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요?


소중한 가족과 함께

따뜻한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