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환상과 현실 간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재방송을 보던 중 백종원 씨가 음식점 주인아주머니와 시청자를 위해 흥미로운 상황을 연출한 것을 보았다. 고객이 사장님의 속도에 맞춰 음식을 주문하는 상황과 한꺼번에 음식을 주문하는 상황의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제 막 발을 들인 음식점 사장님(또는 창업 계획이신 분)들이 가진 환상과 현실의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사장님이 현실 감각을 가지고 해결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던 장면이었다.
내가 아이의 밥을 먹이는 상황이 이와 너무 비슷했음을 알고 혼자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육아휴직 초기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내가 마치 '냉장고를 부탁해'의 셰프처럼 음식을 뚝딱해서 세팅하면 아이가 감탄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숟가락 잡는 법이 아직은 서투니 그것만 잘 잡아주면 앉아서 잘 먹겠거니 했던 나만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음식이 뚝딱해서 나오지도 않고, 아이의 감탄도 없었으며 알아서 잘 먹는 모습은 더더욱 없었다.
내 아이는 밥을 잘 안 먹는 아이 축에 속한다. 식탁에 잘 안 앉아있으려는 성향의 아이에겐 하루 세끼 꼬박 만들어 먹여야 하는 상황이 나에겐 매일 엄청난 임무처럼 느껴진다.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잘 먹어야 할 텐데'라고 혼잣말하는 나를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열심히 아침밥을 준비하고 먹이고, 설거지하고 났더니 점심을 바로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라 허탈했던 경험을 했던 분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슈일 것이다. 중간중간 간식까지 챙겨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실로 음식과 함께한 하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 아이의 특성을 보면 매체에서 묘사하는 밥 안 먹는 아이의 모습과 상당 부분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으로 아래와 같이 말이다.
-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잘 안 먹는다
- 밥은 갓 지은 밥일 경우, 잘 먹는 확률이 높아진다
- 시시각각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다
- 잘게 썰어 여러 음식의 재료를 혼합해도 귀신같이 알아맞히고 뱉거나 그것만 뺀다.
- 식사시간이 주로 40분 - 1시간가량 걸린다
이 성향이 언제쯤이면 돌아올까란 기약 없는 희망을 가지며, 내가 안고 가야 할 숙제려니 했다. 앞으로 어떻게 바뀌는지 지켜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잘 먹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이래저래 시도했던 것 같다.
많은 육아정보 채널을 통해 공통적으로 아이가 식사시간을 즐거워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되도록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의견이 많았다. 아이가 음식을 먹는 것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초기 몇 달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난 우선 간단하게나마 나만의 육아원칙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다.
원칙 1. 힘들더라도 식사와 영상 보기는 병행하지 않는다.
원칙 2. 아이에게 밥은 정해진 시간에 먹는 것이고, 안 먹어서 배고프면 다음 식사 시간까지는 먹을 수 없음을 말해준다.
원칙 3. 정해진 시간 동안(45분-1시간)은 최선을 다해 먹이되 시간이 지나면 정리한다
원칙 4. 이 원칙에 융통성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되도록 이 원칙을 따라주십사 아내와 양가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요즘의 특성에 대해 적극 공유한다.
이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아이가 서로 다른 원칙에 헷갈려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먹일 때 내가 답답해하지 않으려는 장치의 일환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육아 갈등(부부간 또는 조부모와 부모 간)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육아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란 생각에서였다. 결정적으로, 한번 습관을 잡았다가 원칙이 무너지면 그것을 바로 세우는데 또 상당한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란 이유요, 그 노력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시도한 방법은 숟가락을 활용한 비행기 놀이였다. 숟가락을 이래저래 흔들며 비행기 소리를 낸 다음 입에 쏙 넣어주면 아이는 '이게 뭐지?' 라며 어리둥절하거나 재미있어하며 먹었었다. 하지만 이 약발은 잠시. 아이의 개월 수가 늘수록 비행기 놀이는 식상해하며, 나중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다른 것과 결합하여 심폐 소생해야 할 놀이 방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아빠들이 이러한 시도를 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밥을 잘 안 먹는 아이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루트가 크게 4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첫 번째는, 주의 분산시키기.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재미를 느끼고 있을 때 무의식 적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식탁에 장난감을 두거나, 책을 펼쳐 놓거나 새로운 물건을 두어 탐색하는 동안 먹이는 방법이 예가 되겠다. 두 번째, 음식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음식 자체에 관심을 갖게끔 하여 먹는 것에 더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인데 사실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것 같진 않다. 세 번째는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사람들의 말을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각도로 설명해 보는데, 이것을 먹어야 건강해진다거나, 감기에 안 걸린다거나. 누구처럼 튼튼해질 수 있다거나 하는 등이 예가 되겠다. 네 번째, 엄격하게 식사습관을 가르치기. 말 그대로 타이트한 원칙을 세우고, 때론 언성을 높이며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인데, 이 중 네 번째 옵션은 나중에 더 커서 정 안될 때 사용하자란 생각으로 배제하고 나머지 세 가지 루트를 활용하는 형태로 나의 육아 스타일을 정의했다.
1) 함께 장보기. 다양한 음식 재료들을 눈에 익힐 수 있도록 하기(루트 2)
마트에 항상 장을 같이 보러 간다. 이것저것 식재료를 눈에 익히고 식재료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함인데, 개월 수가 지날수록 호기심도 많아지는 지라, '이건 뭐지? 저건 뭐지?' 하며 물어보면 자연스레 답해줄 수 있고 감사하게도 각 물품엔 태그가 붙어있기 때문에 이름도 정확히 알려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 시식 코너의 장면 연출하기(루트 1, 2)
마트에 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마주하는 시식 코너. 시식코너에서 맛보라고 주시는 음식을 조금씩 먹어보며 아이의 반응을 살핀다. 아이도 마트의 시식 코너를 재미있어한다. 말을 잘 못했던 시기에는 이쑤시개로 찍는 행동을 하며 '콕'이라는 소리를 내서 의사 표현을 했다. 이에 착안해서 집에서 밥을 잘 안 먹을 때면 시식코너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여 아이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반찬을 이쑤시개나 산적에 꽂아서 아이가 한입에 쏙 먹을 수 있게끔 해보았다.
3) 본인이 먹길 희망하는 것과 밥을 연계하기(루트 1)
아이가 배고파서 뭐가 먹고 싶다는 신호가 올 때 딱! 모든 음식이 완성되게끔 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 언제 배고파하는지도 잘 파악이 안 될 뿐 아니라. 절대 아빠가 음식을 다 만들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요즘은 뻥튀기에 꽂혀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뻥튀기를 찾아 먹고자 한다. 한번 주면 만족할 때까지 밥도 안 먹는 터라 난감했던 차에 뻥튀기 위에 밥을 올려주면 어떨까? 란 시도를 해보았다. 반찬과 밥을 함께 넣어 뻥튀기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니 밥도 금세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이것이 맞는 접근인가 싶기도 하지만, 본인이 먹고 싶어 하는 것과 밥을 연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으면 그것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4) 함께 음식 만들기(루트 2)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요리 프로세스에 단 1%라도 아이를 참여시키는 방법이다. 요리에 들어갈 채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장난감 칼로 썰어보게끔 한다거나. 수제비를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떼어 냄비 속에 넣어보는 등 장난감 식재료와 실제 식재료를 비교해주고,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게 함으로써 아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본다. 단 1% 참여한 요리라도 아이가 만들었음을 상기시켜 주면 음식에 대한 Ownership 때문인지 더 잘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집안 구석구석이 식재료로 어지럽혀질 수 있다는 것과, 모든 프로세스에 참여하고자 주장하는 아이와 함께 있어 요리 시간이 배가 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옵션이긴 하다.
5) 밥 먹으며 아빠와 대화하는 시간 갖는 연습하기(루트 2,3)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모습은 식탁에서 온 가족이 다양한 주제의 얘기를 하고 웃으며 먹기이다. 내가 어렸을 때, 식탁에서 박장대소하며 때론 밥풀을 튀기며 온 가족이 밥을 먹었던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에서 나오는 사건이나, 어떠한 현상에 대해 아빠에게 의견을 물어보거나, 내 의견을 피력할 때 아빠가 제시해준 또 다른 의견은 나의 사고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아이에겐 이러한 것을 강제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시도해 보는 연습이 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몸동작과 함께 리마인드 해주거나,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떤 것인지, 오늘 날씨는 어떤지 또 아이가 하는 간단한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해주는 등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해 보지만 아직은 오래 지속되진 못한다. 장기적으로 천천히 쌓아야 할 우리만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