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Town에 관한 기억
나는 초등학생 때 SimCity 2000 게임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리고 정말 잘하고 싶었지만 너무 못했다.
초반에는 나쁘지 않았다. 도로 깔고, 공장 짓고, 전기선 연결해 주고. 주거, 공업, 상업 구역 정해주고, 수도 연결해 주고, 쓰레기장 만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항상 학교나 경찰서, 소방서를 지으면 갑자기 재정이 적자가 나기 시작하면서 도시가 파산하곤 했다. 나의 정성 어린 도시계획은 언제나 도시파괴가 되곤 했다. 그리고 어린 나는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교실 컴퓨터에 새로운 게임이 깔렸다.
SimTown.
SimCity 2000보다 난이도가 쉬운 작은 마을을 만드는 어린이용 게임이었다.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단순했다. 괴상하게 생긴 건물들을 하나씩 지을 수 있었고, 공원과 벤치등을 만들면 사람들 만족도가 올라갔고, 차가 움직였고 보행자들이 오갔다. 내가 원하는 세상이 여기 있었다.
유현준 교수님이 도시에서의 벤치의 중요성에 대해서 몇 년 전에 이야기한 것을 아는가? 나는 벤치와 나무, 공원의 중요성을 이 게임 덕분에 초딩때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교실에는 컴퓨터가 한대 있었고, 아이들은 모두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느라 차분히 앉아서 집중해서 나의 세상을 만들 수가 없었다. 아침과 점심때 잠깐 10분 정도밖에 게임을 건드는 정도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친구들이 이 게임을 할 때 나는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마을을 만들 수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남자아이들은 그럴 때가 있다. 평소에는 친구들이랑 다 같이 나사 빠진 바보같이 노는데 순간적으로 나만 정상인이 될 때, 아니면 무엇인가를 나만 뭔가 이해하고 알고 있을 때가 있다. 혼자 정신 차린듯한 상태. 그리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데 아무도 듣지 않을 때,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 때 오는 답답함과 좌절감. 하지만 그 당시의 나의 수준으로는 이런 감정을 인지하지 못했고 이해도 안 되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9-10살의 소년이 친구들을 설득하여 최고의 마을을 만들려는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내가 친구들보다 더 성숙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 나를 보고 좌절한 친구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의 열과 성을 다한 귀띔을 친구들은 귓등으로 들었고, 나는 어느 순간 이 친구들을 데리고 성공적인 마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을 나 혼자서 해야 한다. 이 멍청이들과는 이상적인 마을을 도저히 만들 수가 없다. 꼭 내가 꿈꾸는 완벽한 마을을 친구들의 방해 없이, 적자의 공포도 없이 만들겠어.'
지금과 다르게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고, 게임도 CD로 나왔었다. 게임을 할 때마다 CD를 컴퓨터에 넣어야 하는 게임도 있었지만 SimTown 같은 게임은 한번 설치를 하면 두 번 다시 CD가 필요 없는 게임이었다.
딱 하루만 CD를 빌려서 집으로 가서 설치하면 된다. 제발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나는 이 게임을 하고 싶었다. 집에 있는 486 컴퓨터가 이 게임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날 방과 후, 나는 담임 선생님께 다가갔다. 선생님은 웃길 때도 있지만 조금 무서운 편이었고 나는 선생님과 딱히 가깝지 않은 내성적이고 평범한 학생 1이었기에, 굉장히 큰 마음을 먹고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선생님, 저... 심타운 게임 CD를 하루만 빌려가면 안 될까요? 집에서 설치만 하고 바로 다음 날 꼭 가져올게요."
선생님은 나를 쓰윽 보고 차갑게 대답했다.
"안 돼."
선생님의 대답은 예상대로 짧고 단호했다.
'힝...'
슬펐지만 나는 어른의 거절에 잘 순응하는 아이였고, 바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물러섰다.
하지만 반에서 친구들과 얽혀서 게임을 할수록 나의 답답함은 커져만 갔고 동시에 나의 이상적인 마을에 대한 이미지는 선명해져만 갔다. 며칠 뒤에 참을 수가 없던 나는 또다시 선생님을 찾아갔다.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순응했겠지만 나의 간절함은 이미 열망의 급행열차를 탑승해 버렸고, 내리실 문 따위는 없었다.
다음 날 또다시 선생님께 부탁했다.
"안 돼."
선생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선생님, 제발요. 제발 부탁이에요. 딱 하루만이요. 꼭 내일 가져올게요."
선생님은 조용하고 별 볼일 없는 애가 왜 이러나 싶어서 나를 쳐다보더니, 제안을 하셨다.
"그럼 이렇게 하자. 왜 빌려가야 하는지, 이 게임이 교육적으로 어디가 좋은지, 왜 너에게 중요한지에 대한 글을 써와. 그러면 생각해 볼게."
선생님의 대답에 나의 심장은 기쁨에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치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여자애한테 사귀자고 고백을 했는데 YES라고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쳤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굣길의 버스에서 내내 무엇을 어떻게 쓸지 고민을 하고, 노트에 끄적였다.
그날 밤, 나는 진심을 담은 내 생애 첫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라고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마을을 만들어보면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계획을 더 잘 세울 수 있다, 생태학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자원과 공원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등등 내가 몇 달간 하루에 잠깐씩 교실에서 깨작거리면서 느끼고 배운 것들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어휘들을 총동원해서 아주 정성스럽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글을 썼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로 써서 프린트하는 게 아닌 종이에 손으로 쓰는 거라서 여러 번 쓰고, 지우개 흔적에 더러워진 종이들을 찢고 새 종이에 만년필로 최대한 깔끔하고 이쁜 필기체로 썼다.
다음 날,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반 아이들이 대략 교실을 다 떠났을 무렵에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다가가 내가 쓴 글을 제출했다. 선생님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어라, 진짜 했네? 설마 이걸 진짜 할 줄이야.' 그땐 몰랐지만, 아마 선생님은 귀찮은 숙제거리를 내주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내주셨던 것 같았는데 정말 써와서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슈렉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선생님을 보고 있는 나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읽어보고 내일 알려줄게."
또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하루만 기다리면 된다. 24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내일이면 드디어...라는 생각으로 나는 들뜬 마음으로 집에 왔고 다음 날 어떻게 마을을 만들지 생각만 하다가 잠에 들었다.
마침내, 약속의 날.
일과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선생님께 찾아갔다.
"선생님, 저... 이제 제발 CD를 빌릴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마치 내가 정말 이걸 썼나 시험이라도 해보듯이 내 글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고 했고, 나는 열렬히 설명을 했다. 선생님은 다 듣고 웃으며 드디어 CD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내일 꼭 가져와라."
"네! 약속할게요!"
나는 전속력으로 집으로 왔다. CD를 컴퓨터에 설치하고 제발 실행돼라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게임을 실행했다. 다행히 게임은 문제없이 잘 돌아갔고, 나는 최고의 마을을 만들 수 있었고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다양한 마을을 만들었다.
다음 날, 나는 약속대로 선생님께 CD를 돌려드렸고, 감사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나와 선생님 사이의 개인적인 거래(?)는 끝이 났고 나는 다시 교실의 평범한 학생 1로 돌아갔다.
가슴 뛰는 일을 하라, 즐거우면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진부한 말들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릴 적의 나의 SimTown에 관한 강한 열망과 간절함은 나를 낙관적으로 만들어줬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게 느껴지게 했다. 마치 별을 먹은 슈퍼마리오처럼 모든 장애물을 가볍게 무시하며 질주하게 만들어줬다.
그때는 이런 심오한 교훈을 얻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이때 나는 간절함과 열망이 주는 추진력을 처음 경험해 본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나의 순수한 열망으로 무언가를 쟁취해 낸 값진 경험이었다. 이 어린 시절의 순수한 열정이 만들어낸 성취 경험은 무의식 깊은 곳에 새겨져, 거의 3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는 SimTown CD 같은 것이 하나씩 있지 않을까? 특히 어린이들과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가슴 뛰는 간절함을 외면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도전하는 경험을 더 많이 만들어가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주는 흔치 않은 최고의 경험치 보너스 이벤트이고, 이 이벤트는 유통기한이 있으니깐 말이다. 그리고 두려울 수 있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는 경험치는 무궁무진하니깐.
언젠가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Mr. Albright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처럼 아이에게 이런 경험을 많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다.
몇 주 전에 우연히 이 기억과 선생님이 생각나서 선생님을 검색해 봤는데 최근에 은퇴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제가 기억이 나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아직도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 이 글을 쓰고 얼마 뒤에 부모님과 통화하면서 과거 이런 일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냐고 여쭈어봤다.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의도치 않은 나만의 비밀이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