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네필 스타터 팩 07]
칸의 총애를 받던 젊은 감독 자비에 돌란의 존재감이 2020년대에 들어 옅어진 것은 사실이다.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은 2022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은 두 사람의 대표작이 전혀 아니고, 은퇴작/유작조차 아니다. 공개 당시에도 돌란 특유의 스타일이 담긴 연출이 다소 냉담한 반응을 얻었었다. 그러나 퀴어와 그 가족의 실패한 소통을 다룬다는 면에서는 꽤 매력적인 작품이다.
극작가 장-뤼크 라가르스 Jean-Luc Lagarce 가 1990년에 내놓은 동명의 희곡 자체가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당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던 작가는 주인공 '루이'를 통해, 서로에게 일말의 애정은 있지만 어긋나기만 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냈다. 결과물에서 연출자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넘쳐흐른다는 평이 있지만, 다루는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지문 없이 대사로만 이루어진 실험적인 희곡을 구체화하는 덴 별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영화는 루이가 고향의 가족을 방문하러 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집을 떠나 작가로 성공했고 십이 년이라는 세월 동안 가족들을 멀리하며 살아왔다. 도착한 그는 가족들의 환대를 받지만 불편함을 느낀다. 어머니는 아들이 온다며 옷을 차려입고 음식을 잔뜩 준비했다. 루이는 말도 행동도 거친 형 앙투안과 이제 얼굴을 처음 보는 형수 카트린, 나이 차가 많이 나 기억 속 어린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진 여동생 쉬잔까지, 말 그대로 서로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으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인다. 이 가족이란 존재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소리 지르며 싸우다가도 금세 풀어지고 다시 언성을 높이고, 루이에게 애정과 비난을 동시에 쏟아내고, 그를 친절하게 대하다가도 실언을 내뱉는다.
외부에서 온 가족 구성원인 형수 카트린은 다른 가족들처럼 루이를 보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루이는 그나마 그녀와 대화를 좀 나눠보는데, 여기에 앙투안이 끼어들고 이후 남편 앙투안을 두둔하는 모습에 카트린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안다. 그는 나이 든 엄마를 돌봐야 해서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동생 쉬잔의 동경과 원망을 알아차린다. 그가 형의 투박하고 상처 많은 손을 보면, 관객도 이를 따라 차남이 회피한 책임까지(원작 희곡에서는 루이가 형제들 중 첫째이다) 도맡아 가족을 부양해 온 앙투안의 고달픔을 깨닫는다. 여기 있는 가족들의 삶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루이는 소파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는 사람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안다. 파고들 틈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내 삶의 주인은 언제 어디쯤에서야 나인가? 루이의 지적이고 우아한 평소 생활에서는 한때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유명한 작가이고 퀴어이며, 자신의 힘으로 낯선 곳에서 제 삶을 일궜다. 지나가던 어린애가 장난으로 눈을 가리고 도망가는 일 정도는 그의 주인됨을 훼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 떠나야 했던 이유가 있었듯이, 지금은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극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대화와 말다툼뿐이다. 표면에 드러나는 내러티브가 새롭다거나 난해하지는 않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그 이유를 거의 대사를 통해서만 불친절하게 설명할 뿐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계속해서 주인공과의 동일시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무엇 하나 뚜렷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루이는 자신이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한다. 가족은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다. 그러한 상황을 개선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다. 그는 앞으로는 자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나려 한다. 벌써 가냐며 아쉬워하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그를 서둘러 돌려보내려는 형이 다툰다. 상황이 종료되고 가족들이 하나둘 루이의 옆을 떠나자, 그는 남아있는 카트린에게 아무 말 하지 말아달라 요청한다. 그녀마저 나간 뒤 루이는 집안을 날아다니는 새를 본다.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대화의 모양새를 갖추고는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소통에 실패한다. 들리되 듣지 않는 듯한 장면들은 연극의 솔리로키(soliloquy)를 연상시킨다. 어두운 화면에서 독백으로 시작하는 극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프롤로그와 같고, 다른 등장인물들이 하나둘 사라진 무대(집)에 혼자 남았다가 이내 퇴장하는 루이의 모습은 연극의 에필로그처럼 보인다. 집의 전경을 잡는 마스터 숏 하나 없이 극이 끝나는 점 또한 연극적이다.
<단지 세상의 끝>의 루이는 원작자의 자전적인 인물인 동시에 연극/영화 내에서 모든 시퀀스를 추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고향을 찾았고, 이로 인해 대부분은 대화와 말다툼인 극의 사건들이 촉발된다. 여기엔 명확한 적대자도 조력자도 없으며, 주인공은 가족조차도 결국은 타인임을 재확인하고 혼자인 삶으로 향한다. 연출자는 관객이 그 공허를 마주하는 것을, 그 어떤 서사보다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한다는 루이 어머니의 말은 한없이 미끄러진다. 이 말은 먼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기에, 여기가 세상의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