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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할미 Dec 09. 2020

구르고 있다.

구르고 있지만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하면서 집안일을 멋지게 해낼 거라 나 자신에게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편 아침을 챙겨주고 잘 다녀오라고 손 한번 흔들어 준 뒤 근처 공원에서 아침운동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방에서 구르기를 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이쪽저쪽 서운한 곳이 없도록 골고루 굴려 가며 방바닥을 문질러 주었다. (엄마는 이 행위를 방바닥 엑스레이라고 표현하신다.) 그렇게 열심히 문지르다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나를 위한 점심을 준비한다. 사실 별거 없다. 남편 아침 메뉴를 그대로 재현하거나 결국 라면이거나...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면 그래도 오후엔 정신을 차려 보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손가락 운동을 한다. TV 리모컨 누르기... 이것도 오른손 왼손 차별을 두지 않도록 손을 바꿔가며 열심히 운동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남편이 퇴근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제야 내일이 시험일인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든다. 쌀을 씻어 불에 올려두고 청소기를 대충 돌리고... 냉장고에 있는 것 중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것 위주로 골라 그날의 메뉴를 탄생시킨다. 남편이 오면 맛있는 냄새가 많이 날 수 있도록 시간에 맞춰 볶거나 끓이는 것도 나만의 노하우다. 

 도어록의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문 앞에 나가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얼른 다시 주방으로 간다. 최대한 바빠 보이게 말이다. 뭘 하길래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냐며 좋아하는 남편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 미소를 한번 날려 주고 함께 저녁을 먹는다.

 겨우 잘 감추고 있는 내 모습에 남편은 감동하며 좋아한다. 집을 잘 정돈하고 맛있는 것 까지 해주니 최고라며 치켜세운다. 아이고... 불쌍한 내 남편... 난 완벽하게 당신을 잘 속이고 있구나... 사실 남편이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혼자 노력하고 연기를 한다. 

 집에 있으면 눈에 보이는 일은 많다. TV며 책장에 쌓인 뽀얀 먼지도 눈에 들어오고... 유리문에 찍어놓은 손자국도 눈에 들어온다. 예쁘게 키워보겠다고 데리고 온 화초들 위에도 먼지가 뽀얗고, 빨래는 금방 쌓여간다. 방바닥에 머리카락은 도통 누구의 것이 저렇게 많이 빠지는지... 한 끼만 먹어도 설거지는 한가득이고... 문만 열면 쏟아질 것 같은 반찬 그릇도 잘 정리를 해야 할 텐데... 공부하겠다고 사다 놓은 책도 한가득, 읽겠다고 도서관까지 가서 빌려온 책들도 한가득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누워서 해야 하는데... 할 일이 많은데... 그러다 보면 나는 왜 이것도 못하지? 아니.. 안 하는 건가? 나는 도통 왜 이러는 거지? 하며 내 원망으로 끝이 난다. 

 한없이 많아 보이는 일들이 버겁고 무섭다. 남들 다 하는 집안 살림인데... 더더군다나 내 주변엔 애까지 키워가며 일도 해가며 하는 일인데 난 왜 이러나 자책을 수없이 한다. 결국 또 뒹굴거리다 남편이 올 시간에 맞춰 설거지를 후딱 하고, 청소를 한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바보 같다. 제일 한심하다. 

 어떤 하루엔 남편을 보내고 그냥 서 있었다. 앉으면 누울 것 같고... 그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춥지만 창문을 열어서 밖을 구경했다.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음악을 틀었다. 그러니... 청소할 용기가 났다. 열심히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을 닦기까지 했다. 천천히...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들으며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모처럼 먹고 싶은 메뉴도 생각났다. 그렇지만 집에 재료는 없었다. 오랜만에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아... 배달을 받으려면 옷을 갈아입어야겠네... 얼른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도착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치우다 보니 재활용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들고나가 비우고 있는데 햇살이 좋았다. 그래서 그대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돌다 보니 동네 마트에 세일을 한단다. 그래서 몇 가지 집어 들고 따뜻한 라테 한잔 사들고 집으로 왔다. 별것 아닌데...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을 글로 쓰고 싶어 졌다. 

 요즘도 종종 남편이 나가면 창을 연다. 그리고 또 할 용기가 생기면 천천히 한 가지씩 해 본다. 싱크대는 다 정리했고, 베란다 창고도 정리를 마쳤다. 오늘은... 냉장고 정리를 해 볼참이다. TO DO 리스트를 작성해 가며 그 리스트에 깔려 살 때는 오히려 몰랐던 즐거움이다. 게으른 것 같지만 하나씩... 지금에 만족하기로 했다. 또 엑스레이를 촬영하고 싶은 날엔 그렇게 한다. 다만...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ㅋㅋ 글을 쓰니 들키는 게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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