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호할미 Dec 17. 2020

싸구려 위안

싸다고 다 나쁜 건 아니지만 다 좋은 것도 아니었다.

 최근에 등산을 시작했다. 집에만 콕 박혀 있으니 걷잡을 수 없이 찌는 살에... 또다시 시험관을 하면 더 찔지도 모르고... 체중이 증가하면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집 앞 하천가를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도통 효력이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등산이었다. 그렇지만... 등산은 고등학교 가을소풍 이후... 아!! 한 4년 전쯤 직장 야유회 이후 간 적이 없는 것이다. 잘 해낼 수 있을지 겂이 났다. 

 이것저것 장비를 엄청 챙겼다. 등산도 잘 안 갔는데 집에 등산 가방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등산을 갈 때 샀던 등산 스틱이랑, 등산화도 있었다. 정상에서 컵라면이라도 먹으려면 보온병도 필요하고, 가볍고 작은 돗자리에 경량 컵도 있다. 대박! 장비만 보면 매일 산에 가는 사람인 줄 알겠다.

 새벽같이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거리두기를 해야 하니 사람이 없는 시간을 택했다. 바다 근처에 있는 산인 데다가 배를 만드는 공장이 주변에 있어 야경이 너무 멋졌다. 그렇지만 너무 깜깜했다. 아... 발끝만 겨우 디디며 가는데 남편은 옆에서 짠! 하며 손전등을 꺼내 앞길을 비춰 주었다. 신이 나서 열심히 산을 올랐다.

 한 시간쯤 넘었을까? 정상에 도착했다. 203M 되는 낮은 동산이었다. 해도 금방 뜰 것 같았다. 주변에 사람들 도 한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허락해 주지 않아 해가 뜨는 건 못 보고 준비해 간 커피만 홀짝이고 내려가기로 했다. 라면은... 203M 오르고 먹긴... 좀 민망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집에서부터 겨우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이 지났는데 커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펄펄 끓는 물로 싸 왔는데... 그리고 등산스틱으로 땅을 짚어가며 오는데 왠지 불편했다. 너무 낮은 거였다. 다른 사람들 스틱은 손이 가슴까지도 올라오도록 긴데 나는 허리춤에 겨우 닫는 거였다. 심지어 무거워서 짐같이 느껴졌다. 내려오는 길에는 계속 발에 모래가 들어와서 보니 신발 밑창이 벌어져 있는 거다. 참나... 몇번 신지도 않았는데 오래돼서 그런가? 


집에 와서 씻고서는 TV를 보다 집 정리하는 걸 봤다. 나도 괜히 정리가 하고 싶어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적어도 3-4년은 그냥 넣어두기만 한 가방도 여러 개, 길에서 오천 원, 만원 주고 산 털장갑도 여러 개, 필요할 때마다 새로 산 저렴이 볼펜도 한가득, 연초에 공짜라고 받아온 다이어리며 달력도 한가득에, 우산은 죄다 공짜로 받은 거, 부러진 거, 구멍 난 거, 멀쩡한 우산은 딱 2개였다. 신발도 발아 파서 못 신는 게 수두륵 하고 지금 매일같이 쓰는 냄비는 회사에서 명절 선물로 줬던 건데 손잡이가 흔들흔들한다. 아이고... 버리려면 쓰레기봉투값이 더 나오겠네...


 한때 우울한 마음을 쇼핑으로 달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에 감당해야 할 것은 많아 늘 돈이 없었던 내가 무슨 쇼핑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다 보니 문구점에서 그날 주머니에 있는  돈만큼 사고, 없는거 빼고 다 있다는 그곳에 가서 바구니 가득 무언가를 쓸어 담았다. 내 보온병도, 연필에 우산도, 털장갑도 다 그렇게 우리 집에 있는 것들이었다. 서랍 가득 들어 있는 가방도... 명품은커녕 브랜드도, 로고도 하나 없는 가방, 등산화도 폐업해서 어쩔 수 없이 싸게 판다는 매장에 가서 발에 맞는 신이 아닌 주머니 사정에 맞는 걸로 사고, 스틱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제일 싼 걸로 샀다. 신발장에 가득한 신들도 그렇다. 내 발에 맞는 것보단 주머니 사정에 맞춰 샀더니 안 맞다. 결혼하고 남편이 수제화 집에 가서 맞춰준 신 두 켤레만 너무 편해 그것만 주구 장장 신는다. 우산도 개업 집에서... 아님... 그 뭐든 싸게 판다는 곳에서 산 비닐우산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은 이상하게 수명이 짧다. 아니면... 제 역할을 한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못한다. 꼭 나 같다. 이런...


 그때... 천 원짜리 몇 장을 주머니에 넣고 이 물건들을 살 때는... 월급을 타서 나를 위해 제대로 한 푼 써보지도 못한다는 억울함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어 행복했다. 심지어 등산화를 산 날은 평소에는 잘 신지도 못하는, 내 기준에 가성비가 전혀 없는... 오로지 취미를 위해 뭔가 살 수 있다는 게 내가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흐뭇해하고 또 힘들어지만 천 원짜리 몇 장 들고... 다시 반복... 그래서인지 이 물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친구들이 비싼 일본 펜을 색깔별로 필통에 넣고 다니는 걸 보고는 나도 큰 필통도 사고 볼펜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제품으로 채워 넣었다. 왜 일제가 아니냐며 짝퉁이라고 하는 속없는 친구한테 나는 국산을 애용하는 애국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결국 잘 안 썼다. 난 빨파검 3가지 이상 잘 안 쓴다. 그렇지만 똑같이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집에 있다. 갖고 있던 지갑이 닳아 새로 사야 하는데... 망설이다가 문구점에서 물방울무늬 무늬 지갑을 만원 주고 샀다. 한동안 누가 지갑을 볼까 봐 조금 부끄러웠다.  결국 새로 샀다. 옷도 디자인 보단 싸면 샀다. 결국 불편해서 못 입고, 겨울옷인데 추워서 못 입기도 한다. 입는 옷은 정해져 있다. 옷장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한심스러울 때가 더 많다. 살 땐 옷가게 싸게 잘샀다고 신나서 들고 나왔는데...

 요즘도 종종 그렇다. 과일을 사러 가면 먹고 싶은 황금향 못 사고 귤사온다. 그런데 이렇게 사온 귤은 희한하게 맛이 없다. 샤인 머스켓 먹고 싶은데 그냥 청포도 사 온다. 괜히 시다. 샤랄라 커튼 사러 갔다가 그날 특가 하는 것 중에 제일 샤랄라 하는 걸로 골라 왔다.그치만 결국 샤랄라 하진 않다. 가습기도 2만 원 한다길래 얼른 사 왔는데 뿜어내는 물보다 새는 물이 더 많다. 남편 구두도 여러 개 사줬는데 불편하다고 신는 것만 신는다. 가격도 말 안 해 줬는데 희한하게 싼 건 안 신는다.


 싸다고 다 나쁜 건 아니지만... 제 역할을 끝까지 못하니 결국 다시 사야 한다. 내 발에 맞게 맞춘 신발은 다른 신에 비해 좀 비싸다지만 7년이 다돼가도록 만 원 들여 수리 한번 더 해서 계속 신는다. 싸구려 신 4개 살 돈이면 하나 맞출 수 있는데... 우산도 많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좋은 걸로 두 개쯤 더 사두고 몽땅 버려야겠다. 냄비도... 손에는 익었지만 덜렁거리는 건 버리고, 보너스 받아 사뒀던 좋은 냄비 꺼내 써야지. 많기만 한 털장갑도 좀 버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남편에게 좋은 가죽장갑을 하나 사달라고 해야겠다. 아! 생일도 다가오니 생일 때는 등산화 좋은 걸로 사 달라하고, 등산 스틱도 3단으로 접히는 걸로 새로 사야지.


 집에 있는 물건들이 그때의 나를 위로해 줬을진 모르지만 지금은 그때의 나를 떠오르게 해 불편하게도 하는 것 같다. 싼 물건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산 물건이 아니라서... 그냥 허전함을 채우려고 마구 사 들인 것이라서 그런 것 같다. 남편이 20대에 처음으로 사준 오천 원짜리 장갑은 아직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렇지만 내가 어쩔 수 없이 산 물건들을 바라보면 허전하고 외로웠던 내 마음이 들키는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난다. 이젠 그런 싸구려 물건으로 마음을 채우지는 않는다. 경제 사정도 그때보단 나아졌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 나누고, 서로 보듬어 줄줄 알게 되어 가고 있다. 그 시절에... 방 한쪽 구석에 앉아 한가득 쌓여 있는 싸구려 물건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젠 이 쓸모없어진 물건들과 같이 정리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구르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