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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감독 Aug 12. 2021

<피해의식 1>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참 잘 먹었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걸까.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목과 허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유행하던 유아 의자를 중고나라에서 1만 원 주고 구입하여 앉혔다. 5~6개월이 되어 이유식 재료를 바꾸면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원했다. 생과일을 갈아 먹인 이후로는 단 음식을 많이 찾게 되었다. 당시 나는 만 3세가 될 때까지 인스턴트 당류 음식은 절대 먹이지 않겠다는 대단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유식은 닭, 소, 돼지고기와 쌀을 기본으로 해서 이런저런 채소를 부재료로 바꿔가면서 먹였다. 개월 수가 올라가면서 편식을 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이유식을 거부하는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다가 이유식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모습도 함께 보였다. 당연한 성장 과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식기 도구가 다 장난감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이유식을 처음에 내가 떠서 조금씩 먹였다. 한두 번 먹다가 맛이 없으면 휘운이는 고개를 돌려 거부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그만 먹이는 것이 맞다. ‘그래 너도 좋고 나도 편하자’ 정말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배를 든든하게 채우지 못하면 낮잠을 잘 자지 못하고, 낮잠을 잘 자지 못하면 밤에도 푹 못 잔다. 그러면 깨어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짜증을 부린다. 이 순서를 생각하면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어르고 달래서 먹인다. 숟가락을 달라고 하면 먹이던 숟가락을 주고 다른 숟가락을 들고 와서 먹인다. 조금 먹는 척하다가 두 번째 숟가락도 빼앗긴다. 성장하면서 이유식을 자기가 직접 떠먹어보려는 모습을 보인다. 당연한 행동이다. 나는 아이의 발달을 위해서 이유식을 내어준다. 곧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휘운이는 이유식에 손을 넣고 조물조물하다 사방에 던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퍼먹다가 주변으로 휙휙 던진다. 온 주방이 끈적한 이유식 천지가 되었다. 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쓰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휘운이가 하는 행동을 이미 알고 있다. 아기의 성장이나 행동에 관한 책을 이미 몇 권 읽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는 화가 났고 분노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나의 심리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아이가 하는 행동이 당연한 것을 알았지만 화가 나는 내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거창하게 공부라고 할 건 없고 정신과 선생님들이 쓴 책을 읽으면서 천천히 접근을 했다. 전문서적은 아니지만 그런 책이 이해하기가 쉬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의 과거로 돌아갔다. 내가 기억나는 범위에서 제일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심리학 책을 보니 대부분의 이론이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의식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거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내가 어릴 적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양육 형태에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상당히 히스테리(신경과민)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상당히 무관심하셨다. 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글을 어머니가 보시게 된다면 부정하실 것 같다. 아버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실 것 같다.

육아를 한다는 것은 결국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과 같다.

나는 지금 40대 중반이다. 나의 후배 세대까지도 비슷하겠지만 내가 자라온 시절의 전후 세대에는 부모에게 맞고 성장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왔다. 훈육이었고, 오히려 매를 들지 않으면 아이 교육을 잘 못 시키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나 역시 많이 맞고 자랐다. 물론 내 기준이다. 나보다 더 많이 맞고 자란 친구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우리 엄마는 나를 왜 때리고 소리를 질렀을까?’궁금했다. 40대 중반에 나와 가족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그 방법밖에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신이 받아온 방법이거나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식들을 훈육할 때 쓰는 방법을 단순 학습한 것이지, 아이를 위해 무엇이 더 유익한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해한다.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 어머니가 나를 때리고 있으면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셨다. 말리거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나는 그냥 당연히 맞아야 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알람을 맞춰 놓고 늦잠을 잘 때면 어머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자명종을 망치로 소리를 지르면서 때려 부셨다. 나는 무서웠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어머니는 그렇게 큰 충격을 안겨줘야 내가 다음부터 잘 일어나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어머니는 감정 기복이 있었다. 소리 지르고 무참히 때려 부시다가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밥을 차려 주셨다. 나는 늘 어머니의 감정적인 상태를 눈치 보느라 온 신경을 쏟으면서 살았다.

부모님은 늘 다른 집 아이와 나를 비교했다. 내가 이룬 작은 성과는 당연히 해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고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님은 수백 명의 학생들은 진학 상담을 해 주셨지만 정작 당신의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전공을 하고 싶은 지 관심이 없으셨다.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켜줬는데 성적이 좋지 못한 것에 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모든 아들은 본능적으로 작은 거 하나까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는 어렵게 운전면허증을 땄을 때 힘겹게 취득한 만큼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와 드디어 나도 해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면허증을 들고 가서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난 이거 따려고 몇 번이나 떨어지냐?”

그리고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할 일을 하셨다. 난 살면서 칭찬이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돌아보면 나도 재능이 있고 잘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것이 성적과 관계가 없으면 완전히 무시당했다. 아버지는 다른 집 아이들이나, 나 이외에 누군가에는 굉장히 친절하셨다.

나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부모님도 역시 완벽한 사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글에서 쓴 부모님의 모습은 나의 소심함에서 시작된 이미지 일 수도 있다.

부모님은 다른 부분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셨다. 두 분은 아주 가난한 집에서 자라 열심히 공부했고 가족의 요청에 부응하셨으며 작은 단칸 셋방에서부터 한 푼 두 푼 모아 집을 샀다. 또한 나에게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지원해 주셨다. 누군가는 그렇게 지원을 해줘서 내가 정신적으로 나약해진 것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글로 옮기면서까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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