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감독 Aug 12. 2021

<피해의식 2>

그 시절 나를 누가 이해하지?


**아래 글은 과거에 썼던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 시절 나를 누가 이해하지?>

 개월 전에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는 중학교 이후부터 유학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학창 시절 친구는 제가 유일하다고   있습니다.

 

친구와 저는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최근에 시작한 사업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망도 좋고 벌이도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와이프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 그래서 이혼 이야기도 오고 간다고요. (최근에 이혼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 이야기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도 알고 있는 개인사였지만, 친구는 새롭게 느껴지는 게 있었나 봐요. 친구의 부모님도 이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사업체를 운영하셔서 늘 외주 하셨죠. 저도 기억나는 것은 가끔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거실의 큰 1인용 소파에 앉으셔서 양주를 한 손에 들고 무심히 TV를 보시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인사를 드려도 아주 살짝 고개만 천천히 끄덕이셨지 한 번이라도 반갑게 아들의 친구들을 맞이해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IMF 이후 아버지의 사업체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친구는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을 했었죠. 친구는 어린 시절의 자기를 떠올리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이해할 거 같아…”

“뭘?”

“아빠를…”

 

저는 난데없이 갑자기 아빠를 이해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친구는 이야기를 곧장 이어 나갔어요. 자기가 지금 아버지처럼 사업체도 꾸리고 직원들 월급 생각하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돌아다니다 보니 ‘아 그 시절 우리 아빠도 나와 같은 이런 고민에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여성분들이 철없이 엄마를 대하다가 시집가서 아기를 낳아보니 친정 엄마를 이해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 자란 성인이 그 시절 부모를 이해를 하면

그 시절, 어린아이였던 자기 자신은 도대체 누가 이해를 해주나요?

부모님의 그 시절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대로 하고, 그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못 받았던 자신의 과거도 이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친구 역시 자기 아이들에 대해서 자신의 부친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도 아버지 세대와는 달라서 아버님 정도까진 아니지만요. 친구는 이혼을 하면서 아이들을 멀리 유학 보내기로 했습니다.

친구는 아이가 둘인데 첫째가 중3이니 딱 그 친구와 제가 헤어졌던 나이와 같습니다. 그때 저는 매일 붙어 다니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실감이 컸습니다.  미국으로 간다는 들뜬 친구와는 달리 저는 많이 섭섭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저는 친구와 연을 놓지 않고 매달 편지를 쓰면서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오고 있지요 (당시에는 메일이 없어서 편지를 쓰면 미국까지 2주가 걸렸습니다.) 친구에게 말했어요. 딸아이 유학 수속을 여유 있게 해서 아이가 친구들과 충분히 작별할 시간을 주라고요. 사춘기 시절 여자아이들이라 헤어짐이 얼마나 아플까요. 친구는 농담이었겠지만,

“우리 큰 딸내미는 날 닮아서 친구 별로 없어..”

그래서 제가 받아쳤죠

“너도 나 하나는 있지 않았냐. 네가 몰라서 그렇지 친구 있을 거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어린 시절 따뜻하고 살갑고 많이 안아주었던, 그래서 애착이 잘 형성된 부모님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는 해당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잘 형성되지 못한 애착관계를 그대로 자기 자식에게 자신도 모르게 대물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뭘 해도 칭찬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대가 좋은데 지원도 잘해주는데 잘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셨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저는 제가 유별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시절 부모님이 저에게 했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까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과거의 불만에 대한 해소가 아이를 과잉보호하지 않을까 경계를 하면서도 아이가 어린 시절 저를 기억할 때 따뜻한 아빠였다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요?

다시 <피해의식>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고 현재만 우리라고 생각하며 잘 못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내가 결혼식을 앞두고 우리 세 가족은 거실에 물 한 잔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100%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물로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오해와 섭섭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살면서 경험해 본 바로는 사람은 본능적인 요소를 풀지 못하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본능적인 요소로 표출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우회해서 표출되는 것들은 그 결과가 좋지 못하다.  내 속에 이 감정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표출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고, 친구들에게 하소연도 하는 것이다. 부모님은 노인이고 나는 중년을 살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응어리진 것들은 최대한 풀며 살고 싶다. 살아생전에 한마디 못하고 있다가 장례식장에서 눈감고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시신을 앞에 두고 오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우리 아들, 딸이 아빠에 대해 마음속에 큰 섭섭함이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 번째로 나의 피해의식을 지배했던 것은 직업적인 것이다. 나는 영화 일을 했다. 지금은 육아로 경력 단절이 된 상태이지만 다시 그 바닥으로 돌아가고 싶다. 영화 일을 처음 배울 때 독립영화에서부터 시작했다. 예산이 부족해서 나는 버스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연출부(영화의 연출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부서)였지만 인원이 없어서 제작부(모든 제작환경을 관여한다. 제작비와 촬영 장소, 장비 대여 등의 일을 한다) 일을 함께 했다. 힘들게 다니면서 촬영 장소를 섭외하러 가면 거의 대부분 거절한다. 거절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는 마치 그것이 이 작품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문희주라는 사람에 대한 거절’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 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커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거절과 직면한다. 쉬는 날 친구들과 밥 한 끼 같이 하려고 전화를 했다가 친구로부터 일정이 있어 안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업무적으로는 시도 때도 없이 거절을 당할 수도 있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했을 때도 거절을 당할 수 있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일을 배울 때는 대게 사람들이 친절하게 거절을 하지 않는다.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 거친 말로 무시를 하며 거절을 한다. 세상에는 내 말을 조용히 잘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도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았고 일을 하러 나가면 매일 거절의 연속이었다.

이랬던 내가 결혼을 하여 만난 첫아이가 내가 정성을 다 해 쑨 이유식을 거부할 때는 마음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일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거절이라는 것에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내 주변에만 봐도 거절이 나중에 큰 정신질환으로 확대되는 경우도 봤다. 대인기피증이나 무대 공포증도 결국에는 작은 거절의 반복으로 시작된다. 사람마다 거절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같은 대미지를 받더라도 누구는 조금 더 버티고 누구는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의 잘 못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났으므로 사람마다 다른 대처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육아가 누구나 하는 것이므로 육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시되고, 당연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옆집에 누구는 1등 했는데 너는 왜 못하냐도 마찬가지고 어떤 집 남편은 연봉이 얼만데 당신도 더 벌어오라는 소리도 그렇다.

나는 내가 정신적으로 상당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아 앞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애잔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밖에서는 아닌 척했다. 나는 거뜬히 육아를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여러 명의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명의 아기에게 감정적으로 이렇게 휘둘리는 것이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로소, 뉴스에서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하는 엄마들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런 감정상태가 되면서 우리 사회가 육아에 대해서 얼마나 당연시하고 무시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육아는 각자 개인의 가정에서 알아서 잘 키우거나 못 키우는 어떤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과거에는 한 마을 단위로 다 함께 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사회성도 길러지고 서로 힘든 점을 공유를 했겠지만 핵가족이 되면서 우리는 국가 전체가 공동 육아 전선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니까 국가가 한 마을이 되는 것이다. 정책적으로 큰 변화가 단시일 내에 있기는 어렵다. 그전에 정책이 큰 변화를 주려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육아에 대한 인식을 우리부터 바뀌어 주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밖에서 일하는 가족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단순히 육아를 돕고 집안일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응원이 필요하다. 물론 밖에서 일하는 남편(내 경우는 아내가 되겠다)들도 응원이 필요하다. 나도 그렇지만 내 주변의 지인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론화하지 않는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어 큰 싸움이 될까 두려움이 있다. 이것은 결혼을 앞둔 커플에게도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가끔 신문 연예 관련 지면에서 오래 사귄 연예인 부부가 성격차이로 얼마 살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도 이런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다.

발단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그때그때 풀지 않고 덮어두고 지내기 때문이다. 육아를 하는 사람, 밖에서 일하는 사람 서로가 자기 입장에서 힘든 점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넋두리를 지나가는 말로 흘려듣지 말고 잘 들어줘야 한다. 우리나라 남자들도 밖에서 강요받는 감정이 있다. 남자들은 표현을 절제하고 감정적으로 참아야 한다는 사회분위기가 있다. 위에서 말한 본능을 누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다가 욱한다. 본능이 우회적으로 터지면 부정적으로 표출되는 전형이다.

어쩌다 보니 나는 박쥐가 되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중에 포유류이면서 조류인 박쥐는 포유류 세계와 조류의 세계 중, 어느 한 곳에서도 제대로 속하지 못해 양쪽을 이간질하고 소속되지 못하는 동물로 표현된 이야기. 나는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밑바닥에서부터 경력을 다져온 사회인이자 가정주부가 된 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상당히 많은 부모가 스스로의 정신적 문제를 수용하지 못하고 아기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딱 맞는 책이 있다.

오은영 선생의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라는 책이다. 휘운 이는 잘 참는 아이다. 아기 때부터 그랬다. 피검사를 위해서 크고 긴 수혈용 바늘을 꽂아도, 치과에 가도 이를 꾹 다물고 잘 참았다. 문제는 아빠인 나다. 이 책에서 보면 섬뜩할 정도로 나와 비슷한 아빠들이 많다. 정도는 나보다 더 심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나는 허벅지에 바늘을 찌르는 심정으로 많은 화를 누를 수 있었다. 다 읽었어도 내 눈에 항상 보이는 자리에 책을 두고 오며 가며 무의식 속에 ‘욱하는 부모’라는 제목을 상기하려고 노력한다.


작가의 이전글 <피해의식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