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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감독 Sep 19. 2021

<Come Back Home>



이태원에 살면서 재미있는 구경을 많이 했다. 


매년 핼러윈 주간이면 이태원 전 지역이 축제의 거리로 변했다. 휘운이를 안고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지는 차도를 걸었다. 사람으로 넘쳐나는 거리로 나가면 휘운이도 이 광경이 신기한지 음악에 맞춰서 고개를 흔들었다. 여름이면 지구촌 축제를 해서 비싸지만 세계 다양한 문화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가끔은 이슬람 사원에 가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우사단길에 있는 예술인들의 가게에서 특이한 음식과 액세서리도 구경하고, 거리의 화가에게 휘운이의 초상화를 부탁하기도 했다. 놀고먹기에는 너무나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휘운이가 뛰어 놀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환경이었다. 나는 휘운이가 성장하면서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고민이 되었다. 오래된 주택가는 집 문을 나서자마자 각 집에서 배출한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한 각종 쓰레기가 즐비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두 돌 미만의 휘운이는 그 쓰레기를 자꾸만 만지려고 했다. 휘운이와 함께 하는 산책은 골목을 벗어나면 각종 술집, 클럽, 음식점에서 밤새 버린 쓰레기로 넘쳐났다. 내가 맹자의 엄마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곳도 아이를 위해서는 곧 떠나야 하는 곳이었다. 내가 살 던 그 골목에도 어린이들이 많이 살았다. 이 글을 통해서 마치 그곳에는 아이들이 살 수 없는 곳처럼 묘사가 되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 80년대 내가 초등학교 시절 뛰어놀던 그런 동네였다. 오후가 되어 학교를 파하고 온 아이들은 친구네 집 앞에서 ‘~~ 누구야 노 올~자’라는 외침을 2015년도에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언제까지 ‘정감’ 있어 좋다고 안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태원에서 살기 시작하고 2번째 해가 되던 설날에 고향 부산에 갔다. 몇 개월 만에 부산에 남아 있는 친구 두 명과 만나 회포를 풀고 있었다. 한 친구가 곧 이사를 간다는 말을 했다.


-    어디로 가는데?

-    동래에 괜찮은 집이 나와서.. 

-    몇 평짜리?

-    43평.

-    오~~ 43평? 안 비싸나? 근데 벌써 40평대 가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무리 되게..

-    얼마 안 비싸던데 

-    얼만데?

-    4억 4천.

-    어?!


나는 놀랐다. 4억 4천에 거의 5년밖에 안된 43평짜리라니! (당시의 시세이므로 지금은 차이가 있다)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서울 기준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43평짜리 최신 아파트는 당시에 강남은 15억을 훨씬 넘어갔고 강북도 상당히 비쌌다. 친구는 대출을 받아 집을 구했다고 했다. 집은 언젠가는 사야 하고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짐도 많고, 넓은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2억 5천에 20평 초반에 30년~40년 된 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삶의 질이 달랐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친구가 이사 간다는 집을 검색했다. 그리고 포털 부동산 사이트에서 집값을 검색했다. 서울에 오래 살면서 지방은 안중에도 없었다. 휘운이가 생기고 아들을 업고, 안고, 유모차를 밀면서 눈길에 미끄러진 일, 놀이터를 찾아 몇 시간씩 헤매던 일, 골목길에 음식물쓰레기를 만지려는 휘운이를 보며 기겁하던 일, 모든 일이 스쳐갔다. 나는 내가 살던 부산 집을 생각했다. 앞에는 바다고 뒤에는 높지 않은 산이 있었으며 큰 도시이지만 언제나 자연과 어울릴 수 있었다. 게다가 부산에는 아이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있어서 사랑도 더 많이 받으며 성장할 수 있고, 나도 육아의 피로를 조금은 덜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서울에 계속 있었던 것은 솔직히 나의 욕심이었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영화 일. 나도 어쩌면 아무도 알 수 없는 타이밍에 기적처럼 입봉(일본어의 잔재이지만 상징적 표현으로 사용함)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서울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배우들을 만나 현재 한국 영화 시스템에 대해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는 이점.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우리 가족, 특히나 아이를 위해서라면 내려가는 것이 맞았다. 


다행히 아내는 법조 관련 개인 사무실 직원으로 경력이 많았다. 법원이 있는 도시라면 직장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혼자서 꽤 며칠을 고민을 했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내 주변에서 나에 대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 친구 이제 영화일 접었다던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지인들 사이에서 오고 갔던 모양이다. 나에게 조감독으로서 일거리가 계속 들어왔었다. 나는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다며 일자리 제안을 거절을 했다. 몇 번의 거절이 돈 버는 마누라 만나 영화일 그만둔 백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아내는 많은 돈을 버는 직업은 아니었는데도 내가 맞벌이를 안 한다는 이유로 아내가 굉장히 큰돈을 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제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하면 나는 이제 정말 영화 바닥에서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아내도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며칠 후, 아내도 동의를 했다. 나는 부산에 부모님께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전하고 어머니에게 근처에 지금의 전세와 같은 금액으로 집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 집은 어머니가 사시는 오래된 아파트와 같은 단지였다. 내가 중3 말부터 집을 떠나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집은 내부 수리가 되어 있는 곳으로 27평 형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살고 있다. 2016년 2월에 이사를 했다. 동네는 조용했고 집 앞에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이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와 산도 있었다. 아이를 키우기에 너무 좋았다. 부모님도 밑반찬을 준비해서 서울로 보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셔도 되었다. 아내는 태어나 처음으로 부산에서 사는 것이어서 당분간 적응이 필요하겠지만 다행히 금방 새 직장을 구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휘운이었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더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나는 불안했고 우울했다. 패배자 같았다. 내가 한없이 무능한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무능했다. 나는 지난 서울 생활을 돌아보았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정에 불과한 것이 됐다. 부지런함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치를 한 적도, 일 외에 한 눈을 판 적도 없었다. 사람들이 내미는 손을 뿌리 친 적도 없고, 주어진 일의 비중과 받는 돈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했다. 유명인들과 일을 하면서 인정도 받았고, 함께 일한 사람들은 내가 빠른 시일 내에 입봉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빈말이었더라도 나는 나의 서울 생활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원인이 뭘까? 왜? 왜? 나는 안 됐을까?


내 심리상태는 아주 복잡하게 돌아갔다. 겉으로는 차분해야 했다. 육아하는 사람의 심리상태는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내가 부산으로 내려오자 부모님께서도 내가 영화 일을 포기하고 평범한 직장 생활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두 돌이 지나면서 휘운이는 욕구의 표출이 강했고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의 구분이 정말 명확해졌다. TV를 보여주지 않는 집에서 늘 라디오를 켰는데, 처음 듣는 아이돌 댄스 음악이 나오자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음악에 맞춰서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트에 가면 양말까지 벗어던지고 온 마트를 뛰어다니다가 노래가 나오면 또 춤을 추웠고, 에스컬레이터를 보면 포복을 했다. 앞으로 구르고 뒤로도 구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자기가 싫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세상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아이와 어디를 함께 간다는 것이 두려움 그 자체였다. 육아하는 나는 심리적으로 상당히 우울한 상태였고 아이는 주체성이 점점 강해지면서 서로가 힘들어졌다.


주말에는 아이가 부모님 댁에서 시간을 보냈다. 평일에는 휘운이를 데리고 부산에 유명한 곳을 다녔다. 해운대에 있는 수족관도 가고, 지금은 폐업했지만 동물원도 가고. 우리 둘이서 그렇게 다녔다. 엄마는 여전히 일을 해야 했으므로 함께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시기가 아이가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얻는 것이 있다는 생각에 두렵지만 열심히 어딘가로 데리고 다녔다. 해운대에 위치한 수족관에 함께 갔을 때의 일이다. 수족관에는 작은 놀이방이 있었다. 휘운이는 그 놀이방을 보자 신비한 해양 생물은 필요 없고 금방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놀이방으로 다가왔다. 누나들이 휘운이를 데리고 놀아주었다. 고맙게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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