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 화려한 옷을 뽐내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가루로 바스러진 낙엽이 쌓여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인도를 나는 걷고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기세였지만 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친정엄마였다.
"어디니?"
"좀 걷고 있어요."
"막내가 많이 안 좋데..."
"얼마나 안 좋은 거예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이미 너무 많은 장기에 퍼져있어서... 말기 암이라 병원에 있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닐 거야... 엄마... 아니...."
현기증이 밀려와 말을 맺을 수 없었다. 반박하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을 듣고 나니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눈이었다. 두 눈이 마치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앉았다.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울고 싶은데 하얀 마스크가 내 입을 꾹 막고 있었다. 연신 오른팔로 눈물을 닦아봤지만 소용없었다.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어 흐물거릴 때에야 진정이 된 듯 코를 훌쩍였다.
두둑두둑... 굵은 빗방울이 정류장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이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만큼 마음씨도 예쁜 이모는 어디서나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처음 자궁암 판정을 받았을 때에도 아픈 자신보다 걱정할 가족들을 위해 웃어 보였다. 수술 후 올 초에 내가 안았던 이모는 뼈마디가 잡힐 만큼 앙상했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 믿었다. 몇 달 전 암이 재발하고 만나지 못했으니 지금은 그때보다 더 수척해 있을 터였다.
'나~ 이모를 만나려고 비행기 표 예매하고 아이 학교에도 미리 이야기했단 말이야. 다음 주인데... 이모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내가 이모 좋아하는 생선요리, 달달한 머핀들 다 만들어 줄 건데... 그냥 이모는 나만 봐주면 되는데... 그거면 되는데...' 이모를 안고 볼에 얼굴을 비비며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전해주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모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 누워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이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면회가 안된다는 이모. 코로나 19가 그동안 밉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증오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뭐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모에게 문자를 보내고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물방울이 볼을 타고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오늘이 지나면 괜찮을지도 몰라. 아니야 아니야. 이제 나는 어쩌면 좋지?' 나는 그 후로 한참 동안 길을 배회했고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