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을 꾼다.
"신부님, 결혼 몇 번 해보고 오신 거 아니죠?"
"네?"
"아니~ 사진을 찍는데 표정이나 자세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신랑님! 신부님 수상한데요?"
"아유~ 별말씀을요."
"아니야. 뭔가 있다니까."
"사실은요~ 제가 드레스를 100벌 정도 입어보고 왔거든요."
"네?"
결혼식 전 웨딩 포터를 찍는 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헤어숍에서 신부화장과 머리를 곱게 단장했다. 평소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녔던 나는 180도 변한 거울 속 여자가 낯설었다. 길게 붙인 속눈썹 위에 이쑤시개를 몇 개 올려도 끄떡없을 것만 같았다. 예쁘다기보다는 얼굴에 가면을 쓴 듯 무겁고 불편했다. 환하게 올린 머리에 고정된 머리핀들이 수없이 꼽혀 머릿속이 따끔거렸지만 오늘만은 참아보리라 굳게 다짐하며 사진을 찍는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편은 턱시도를 골라 입으며 신부인 나보다 더 신이 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어떤 떨림도 없었다. 다만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며칠 전부터 몸을 혹사시켰다. 아침에 겨우 물 반잔만 넘겼다. 어서 촬영을 마치고 뭐든 위에 넣어줘야 했다. 조금 더 방치하다가는 쓰러지거나 뱃가죽과 등 가죽이 서로 얼싸안고 파업을 선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체형에 맞는 드레스를 골라 차례로 입으면서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테마 앞에서 촬영하시던 분은 나의 과거를 물으셨다. 그 물음에 나는 웃으며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웨딩드레스 100벌을 입어보고 왔노라고...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였다. 그맘 때 내가 사랑하는 막내 이모는 회사를 다니면서 사진을 취미로 배우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이모가 찍은 사진에 감탄하며 직업으로 해볼 것을 권했고 이모는 고민 끝에 퇴사를 결정했다. 사표를 던지기 전 이모는 아마 큰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밑그림은 이러했으니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던 이모 둘과 함께 동업을 하는 것.
손재주가 좋아 뭐든 잘 만들었던 큰이모에게는 드레스 수선과 부케를 만드는 일을, 결혼 전 메이크업을 배웠던 작은 이모에게는 신부화장을, 그리고 막내 이모는 웨딩포토 사진을... 세 자매는 그렇게 완벽한 시나리오를 썼다. 숍을 오픈하고 홍보가 되지 않아 주말이면 나는 이모들과 함께 전단지를 돌렸다. 지금처럼 sns나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었기에 발로 뛰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일은 홍보와 소개를 타고 점점 늘어갔다. 신상 드레스를 만들면 이모들은 가장 먼저 내게 입혔다. 여자들은 모두 하얀 웨딩드레스에 대한 로망이 있다. 나 역시 어렸지만 드레스를 처음 입었을 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와 반짝이는 주얼리들이 나를 동화 속 공주로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이쪽으로 돌아봐. 여기 여기 수선해야겠지?"
"보기엔 괜찮은데, 사진으로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허리 좀 숙이고 이렇게~ 사진 좀 찍어보자."
"좀 웃어~ 어색하게 말고~"
세 명의 이모 앞에서 나는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했다. 그때는 몰랐었다. 이것이 노동이 될 것이라고는... 몇 번이면 끝날 줄 알았던 그 행위는 숍에 갈 때마다 반복되었다. 운이 좋으면 드레스 한 벌을 입어보고 끝나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5~6벌의 드레스를 입어야 이모들은 나를 풀어주었다.
"이모~ 나 결혼할 때 웨딩드레스 입어도 아무 느낌도 없을 것 같아. 아 진짜~"
"이게 다 너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될 때가 있다니까~ 이모가 너 시집갈 때는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주고 사진도 다 찍어줄 거야 그러니 걱정 하덜덜말어. 그거 벗고 이거 입어봐~"
'부디 내가 결혼할 때까지 꼭 이모들의 사업이 번창하게 해주세요.'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내가 결혼하기 3년 전, 이모들은 모두 제주도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이모들은 각자 다른 일을 찾았다. 그 많던 드레스들은 중고나라로 갔는지 당근 마켓으로 갔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단지 이모는 몰라도 된다고 내게 말 했을 뿐이었다.
"우리 조카한테 미안해서 어떡하지? 이모들이 좀 더 오래 할걸~ 그래도 이모집 놀러 오면 가장 멋진 배경에서 너희 가족 찍어줄 테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
"서운하진 않아. 이모 덕분에 내 20대가 온통 웨딩드레스였는걸. 100벌은 넘게 입었을 거야. 그치?"
"모델이 아니고서야 너처럼 드레스 많이 입어본 애도 없을 거다."
웨딩드레스를 많이 입어본 경험이 과연 언제 쓰일까? 싶었다. 이모들이 내게 알려주었던 포즈 하나하나가 몸에 배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빛을 발했다. 다른 예비부부들 보다 훨씬 빨리 촬영을 마치고 고기로 배를 채우면서 찍었던 사진과 내 마음을 이모들에게 전송했다.
'큰이모가 만든 드레스는 이보다 훨씬 예뻤는데... 작은 이모가 화장했으면 떡진 신부화장은 아니었겠지? 막내 이모라면 분명 자연을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남겼을 거야... 아아~~이모들 너무너무 보고 싶어.'
외가에 첫 조카라는 이유로 나는 무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막내 이모와 내 나이 차이는 불과 8살. 이모와 조카 사이가 아니라 같이 나이 들어가는 언니들과 막냇동생처럼 우리는 허물없이 지금도 지낸다. 어제 막내 이모의 말기 암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고만 있다가 20대에 이모가 찍어주었던 웨딩사진들을 꺼내보았다. 신부라고 하기엔 앳된 얼굴의 내가 사진에 담겨있었다. 폰으로 다시 찍어 병실에 있는 이모에게 보내었다.
-이모~ 이모가 찍은 내 사진 봐~ 정말 웃기지? 빨리 나아서 나랑 남편이랑 결혼 10주년 때는 이모가 사진 찍어줘. 그땐 제주 바다 배경으로 예쁘게 찍어줘야 해. 꼭 약속 지켜.-
-그래 알았어. 고마워. 내 새끼-
이모의 짧은 답장에 나는 또 무너져 눈물을 흘렸다. 내가 받은 사랑을 어떻게 다 이모에게 전할 수 있을까~ 소소한 기억들까지 모두 글로 남겨놓고 싶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할 테다. 이모가 꼭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기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가 다시 이모 앞에 설 수 있기를...
나는 101번째 웨딩드레스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