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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r 06. 2021

누군가의 짝사랑 상대 였다는 것-화이트데이 어떤 고백

주말 아침 아들의 우유 요청으로 집 앞 편의점 앞에 섰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입안에 단내가 올라왔다. 형형색색의 동글동글 사탕들이 예쁜 상자에 혹은 작은 인형과 함께 바구니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바나나 우유를 두 개 사 들고 '저 사탕들이 어떤 이의 손에 들려 행복을 줄'를 생각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면서 남자에게 받아본  이벤트 3개 중 하나. (미리 말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남자에겐 프러포즈도 못 받았기에 여기에 포함되지 않음) 12년 동안 학창 시절을 통틀어 단 한 번 뿐이었던 화이트 데이에 이벤트가 내게도 있었더랬다.    


고1. 겨울방학!  나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필요했기에 2개월 정도 학원을 등록했다. 학원비가 저렴한 학원을 찾아 집에서 버스를 타고 왕복 1시간 반 정도를 이동하는 수고쯤은 그땐 견딜 수 있었다. 여고에 다녔던 내가 학원에서 남학생들 함께 자리에 앉아 배우는 건 조금 부담스러운 일. 소심한 나는 후다닥 수업만 듣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필기와 실기를 한 번에 붙어서 더 이상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었으므로 짧았던 학원 생활은 마무리되었고 별생각 없이 고2 생활을 시작했던 어느 날.


3월 14일. 시끌벅적했던 점심시간. 복도에서 "꺄악"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또 남자 친구에게 사탕 받았나 보네.' 점심 먹고 자리에 앉아 고상하게 자수를 하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때 -드르륵-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든 남자가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야~~ **가 누구야?" 맨 앞에 앉아있던 나는 슬로 모션으로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전데요!"

"너야? 너 S고** 알지?"

"아니요 모르는데. 다른 사람 찾아온 거 아닐까요?" 생전 첨 보는 남자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 순간 저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닌 듯 어색하고 낯선 울림일 뿐이었다.


남자는 내 오른쪽 가슴에 명찰을 보더니 썩소를 날로며 책상 위에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턱 올려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남자가 나가자마자 교실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앞자리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너 남자 친구 있었어?' 순식간에 다른 반까지 소문이 났다. 아마 그때 학교에 순간 검색어가 있었다면 나는 당당하게 검색어 1위를 찍었을 것이다.


여고에 용감하게 남자가 들어와 사탕 바구니를 놓고 갔다. 로맨스 소설에서만 읽던 달달한 내용은 막상 당사자가 되고 나면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는 걸 그날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 S고의 **는 떠오르지 않았고 머리만 지끈거렸다.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구냐 너는...'


파랗게 질려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짝이 사탕들 사이에서 핑크색 엽서를 찾아내었다.


- 토요일 오후 3시 컴퓨터 학원 앞 놀이터에서 기다릴게 **가-


간단한 쪽지를 읽고서 그제야 찬찬히 바구니 속 사탕들을 보았다. 하나하나 파스텔톤 비닐로 톤을 맞춰 정성스레 포장한 다양한 모양의 사탕들. 평소 보던 사탕도 아니었을뿐더러 손재주가 남다른 남학생인 게 분명했다. 얼추 보아도 몇백 개는 돼 보였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그 많은 사탕을 먹을 수 없었기에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절반 정도 사탕은 자수 가방에 구겨 넣었다. 부끄러워 하교하면서 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갈 수 없었기에...


토요일이 될 때까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다 보니 내게도 이런 일이. 상대방의 얼굴이라도 알면 좋겠지만 이름도 생소한데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만 깊어졌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기분은 좋았음에도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고, 친구들은 무조건 나가서 확인해야 한다고 자기들이 더 흥분해있었다. 하긴 사탕을 배달한 남자는 얼추 봐도 20대 초반의 오빠 같았기에 S고의 남학생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역시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망의 토요일~ 혼자 나가기 쑥스러워 친구에게 같이 나가자고 부탁을 해 겨우 학원 앞 놀이터에 도착한 친구와 나. 놀이터 구석, 검은색 옷을 입고 벤치에 앉아있는 남학생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가서 이야기를 해봐야 할 일이었다.  친구 그곳에 두고 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손발이 바들바들 떨려 어색한 내 걸음은 더뎠고 한참 후에야 그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왔어? 안 올 줄 알았어..." 나를 보고 일어선 그는 하얀 얼굴에 뿔테 안경,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나만큼이나 떨린 건지 자꾸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몇 번 스쳤다면 익숙할 만도 한데 나는 가 너무 낯설었다.


"음... 네가 나한테 사탕 보낸 거야? 미안한데 나는 널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아서..."

"겨울에 컴퓨터 학원에서 같이 수업받았었어. 너는 앞에 앉아 있다 수업 끝나면 바로 갔으니까 몰랐겠지만 나는 뒷자리에서 널 봤지. 내 이름은 **야. 사실 많이 고민했었어. 네가 계속 학원 다니면 말 걸려고 했는데 너 안 나오더라고... 친구들 수소문해서 알아낸 거야 너.. 어디 학교인지"

"..."

"나랑 사귈래? 나 너 좋아해."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남학생의 고백이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부담스럽게 다가올 줄이야... 아니 해머로 머리 한 대를 맞은 것 같아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미안한데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사탕은 정말 고마워. 그런데 지금 내가 너에게 뭐라고 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당장 이야기하지 않도 돼. 너 폰 없어?"

"나는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메일밖에 없거든. 나머지 이야긴 메일로 보내도 될까?"


가방에서 꺼내 준 노트에 메일을 적는 동안 토마토로 변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시선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뚤비뚤 글씨가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나는 급히 뒤돌아 친구를 향해 뛰어가버렸다.


'왜 나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기껏해야 학원 수업에서 본 게 전부였을 텐데...'


가 궁금하다거나 맘에 든다거나 그런 마음은 없었다. 단지 내게 처음으로 이벤트를 해준 마음이 고마워서 나갔을 뿐. 하지만 '좋아한다'라는 그의 말이 너무 미안해서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함에 죄스러움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통의 메일이 오는 동안 차마 열어보지 못하고 망설이고 망설이기를 며칠. 한참 후에야 메일을 열어서 읽었다. 그 당시 감수성 예민했던 나는 그 메일을 읽고 울컥하여 코끝이 찡해졌다. 그 메일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었으니까...


학원 수업 시간 내가 펜을 돌리거나 노트에 낙서를 하던 버릇,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노란 가방에 스누피 인형을 달고 다녔으므로...) 항상 학원 교실에 들어오면서 바나나 우유는 왜 마시는지에 대한 물음. 화이트데이 이벤트를 위해 친구들 세 명이서 저녁 늦게까지 포장하고 아는 형에게 퀵으로 부탁했던 일. 놀이터에서 처음 대화하면서 많이 떨렸다는 이야기와 함께... 사실 그 아이도 고백이 처음이라 큰 용기였다고~ 내가 거절해도 후회는 없다면서 답장을 기다리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클릭한 메일에는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 쪽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냥 눈물이 났다. 나는 바로 답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내 상황과 졸업 전에는 남자 친구를 사귈 이 없는 이유. 그리고 날 좋아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 아마 평생 3월 14일 화이트데이가 되면 손수 포장한 예쁜 사탕 바구니를 절대 잊지 못할 거라는 내 진심도...                                           

                                                                                                                      

안타깝게도 이 메일이 내가 그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메일이 되었. 그 후 한동안 그 메일은 이어졌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h대에 진학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적었지만 나는 연락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한편에 가라앉아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모를 그 지금쯤 결혼을 했을 테고 어쩌면 아빠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는 내 학창 시절 잊지 못할 이벤트를 선물한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그간 내가 좋아했던 사람만 생각했지. 내가 누군가의 짝사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다른 시각을 열어준 그 남학생이 이젠 잔잔한 추억으로 매년 이맘때쯤 날 미소 짓게 한다. 순수했고 고마웠다고... 이렇게 내 글에 등장해주는 주인공이 되었다고...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들어가는 내 발걸음 위로 포근한 봄 향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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